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순호 Oct 05. 2024

열차는 들판을 질러가고





    09     열차는 들판을 질러가고   / 김순호



          풍경을 보며 가고 싶어 느린 무궁화호를 선택했다


        동해발 오전 9시 55분,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잠에 빠져 들었다.    

30여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늘은 흐리고  마른풀들이 뒤엉킨 겨울 숲을 우울하게 보여주고

있다. 열차는 국토의 정맥처럼 구불구불  뻗어간 강을 끼고돌아 들판을 질러가고 셀 수 없이

비슷비슷한 터널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동해가 가까워질수록 빈자리는 늘어갔고 날씨는 더 흐려지더니 태백에 들어설 즈음엔 희

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앙상한 나무 밑이 보이는 산이나 들판엔   언제  내린  것인

지  이미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데  수시로  바람이 쑤석거릴 때마다  몰려나온   아이들이 

싸움이라도 하는 듯 습기 빠진 가벼운 눈가루가 뽀얗게 허공을 달린다.  기차가 몸을  돌리

며  보여주는   먼 산이 은빛으로 빛나고, 나는 그 빛을 좇아 첩첩 산을 넘나 든다.


     서두르는 사람들을 따라 동해역에 내리니 굳어있는 몸을 스치는  찬바람이 오히려 신선하

게  느껴진다. 계획 대로라면 동해역에서 삼척행 버스를  타야겠지만  정류장 전광판에 보이는 

정보로는 지명조차 몰라 난감하기도 하고 그나마 삼척행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하기에 택시를

타기로 한다. 솔비치로 가는 길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방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싱거

우리만치 타자마자  도착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솔비치 로비엔  이미 아이들과  부모님을 모시

온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로 시장바처럼  북적거렸다.


      겨울철이라 호텔과 리조트 안내를 한 곳에서 축소 운영 하고 있었기에,  번호표를 뽑아 들

고 기다리는 고객들의 불편은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앉을 의자조차 비치하지 않아  지친 

이들은 바닥에 그대로 뒹굴며 보채고 있다. 되돌아갈 수 없어  기다렸지만  아직도 이런 식으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니 의아스러웠다.


    예약한 객실은 바다가 시원하게 보여 로비에서의 불쾌함을 우선 잊게 했다. 짐을 풀고 저녁식

사 전에 백사장이라도 돌아보자는 생각에 서둘러 나왔는데  바로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안전을 

이유로 차단된 곳이 많았다. 아마 여름철 성수기 때나 개방하는 것이리라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바다엔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언뜻 봐도 그리스  산

리니 해변을 떠올리게 하는 백색과 청색의 조형물이 우스꽝스럽고 답답하게 시야에 들어와 짜

증스럽다 (그리스 사람이 와서 보면 어쩌나)  하는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무너지는  부끄러움이

구토처럼 올라왔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가 우리 것을 베껴가게 하지는  못할망정 고요한 우리의

풍경을 뭉개려고만 할까? 그러나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쌓인 곳이 될 터이고  또 어느 아

겐 첫 여행지로  영원히 기억될 곳이 되기도 할 터이기에 경영자의 안목이  조금만 사려 깊

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단순히 유행 따라 조형물을 세우고 허무는 것만이 경영

자의 의무는 아닐 것이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파도가 달려오는 근육질의 푸른 동해 바다를 만나러 갔다가 안타까

움만 숨 막히게 느꼈던 건 내가 예민하고 유난스러워  그랬을까? 게다가 손댈 수 없는 바다만 남겨

두고 눈 닿는 곳마다 사계절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욕심껏 여기저기 놀이 기구와 시설물을  늘어놓

아 도시에  있는 놀이 공원과 다름없는 그곳에서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휴식을 하겠다고  찾아간 

나는  이상한  소외감 마저 들었다. 난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시간이 

지나면 난 이곳을 다시 찾고 싶을까? 







이전 08화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