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보며 가고 싶어 느린 무궁화호를 선택했다
동해발 오전 9시 55분,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잠에 빠져 들었다.
30여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늘은 흐리고 마른풀들이 뒤엉킨 겨울 숲을 우울하게 보여주고
있다. 열차는 국토의 정맥처럼 구불구불 뻗어간 강을 끼고돌아 들판을 질러가고 셀 수 없이
비슷비슷한 터널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동해가 가까워질수록 빈자리는 늘어갔고 날씨는 더 흐려지더니 태백에 들어설 즈음엔 희
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앙상한 나무 밑이 보이는 산이나 들판엔 언제 내린 것인
지 이미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데 수시로 바람이 쑤석거릴 때마다 몰려나온 아이들이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습기 빠진 가벼운 눈가루가 뽀얗게 허공을 달린다. 기차가 몸을 돌리
며 보여주는 먼 산이 은빛으로 빛나고, 나는 그 빛을 좇아 첩첩 산을 넘나 든다.
서두르는 사람들을 따라 동해역에 내리니 굳어있는 몸을 스치는 찬바람이 오히려 신선하
게 느껴진다. 계획 대로라면 동해역에서 삼척행 버스를 타야겠지만 정류장 전광판에 보이는
정보로는 지명조차 몰라 난감하기도 하고 그나마 삼척행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하기에 택시를
타기로 한다. 솔비치로 가는 길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방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싱거
우리만치 타자마자 도착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솔비치 로비엔 이미 아이들과 부모님을 모시
고온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로 시장바닥처럼 북적거렸다.
겨울철이라 호텔과 리조트 안내를 한 곳에서 축소 운영 하고 있었기에, 번호표를 뽑아 들
고 기다리는 고객들의 불편은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앉을 의자조차 비치하지 않아 지친 아
이들은 바닥에 그대로 뒹굴며 보채고 있다. 되돌아갈 수 없어 기다렸지만 아직도 이런 식으로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니 의아스러웠다.
예약한 객실은 바다가 시원하게 보여 로비에서의 불쾌함을 우선 잊게 했다. 짐을 풀고 저녁식
사 전에 백사장이라도 돌아보자는 생각에 서둘러 나왔는데 바로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안전을
이유로 차단된 곳이 많았다. 아마 여름철 성수기 때나 개방하는 것이리라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바다엔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언뜻 봐도 그리스 산
토리니 해변을 떠올리게 하는 백색과 청색의 조형물이 우스꽝스럽고 답답하게 시야에 들어와 짜
증스럽다 (그리스 사람이 와서 보면 어쩌나) 하는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무너지는 부끄러움이
구토처럼 올라왔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가 우리 것을 베껴가게 하지는 못할망정 고요한 우리의
풍경을 뭉개려고만 할까? 그러나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쌓인 곳이 될 터이고 또 어느 아
이들에겐 첫 여행지로 영원히 기억될 곳이 되기도 할 터이기에 경영자의 안목이 조금만 사려 깊
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단순히 유행 따라 조형물을 세우고 허무는 것만이 경영
자의 의무는 아닐 것이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파도가 달려오는 근육질의 푸른 동해 바다를 만나러 갔다가 안타까
움만 숨 막히게 느꼈던 건 내가 예민하고 유난스러워 그랬을까? 게다가 손댈 수 없는 바다만 남겨
두고 눈 닿는 곳마다 사계절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욕심껏 여기저기 놀이 기구와 시설물을 늘어놓
아 도시에 있는 물놀이 공원과 다름없는 그곳에서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휴식을 하겠다고 찾아간
나는 이상한 소외감 마저 들었다. 난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시간이
지나면 난 이곳을 다시 찾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