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채워져야 사라진다.
작년 초가을에 봤던 네 살 아이는 이미 거의 모든 치아가 다 썩어 있었다. 정확히 까만 점이 되어 잇몸에 박혀서 뿌리만 있었다. 다섯 살이 된 아이는 그때보다 더한 상태가 되어 우릴 찾았다.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고 아이 아빠는 어차피 빠질 유치를 치료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
설명을 하고 또 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무식한 걸까
무책임한 걸까
무식해서 못 알아듣는 걸까
귀찮아서 그런 걸까
아버지가 왜 저러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능력 밖의 일이었다.
큰 눈망울의 아이는 내게서 받은 스티커에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고 아빠는 우리의 주의에 짜증이 난다는 듯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양치질만 제대로 해줬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일을 그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그걸 미안해하는 눈치도 후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이는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보다 더 큰 걸 놓치고 있었다.
친구는 둘째치고 아이가 제대로 식사나 하고 있을까 싶었다.
방임일까 학대일까
도대체 그 둘의 차이가 뭐가 그리 크겠는가?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아이를 그냥 놔두면 방임이고 그게 반복되면 학대인 것을...
너무 슬프게도 생각보다 많이 그런 부모를 자주 만난다.
참 다양한 인종별로 말이다.
같은 날, 아이 다섯을 데리고 엄마가 찾아왔다. 엄마는 여섯째를 임신 중이라고 했다.
아이 다섯이 우르르 들어오자 순간 두려웠다.
저 아이들은 또 얼마나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울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너무 신기하게도 녀석들은 엄마와 첫째의 지도아래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엄마는 큰 소리 한 번 지르지도 않고 다정하게 아이들을 통솔했는데 정말 경의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그거 만지면 예의가 아냐"
"얘들아 여기 앉아"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바로 반응을 한다.
애들 다섯을 저렇게 다룰 수 있다는 게 가능하다니. 이건 오은영선생님이 매달이라도 걸어줘야 할 장면이었다.
엄마를 봤다.
엄마 눈에서 아이 하나하나 사랑하는 게 보였다.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 주는 모습에서 알 것 같았다. 따뜻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분명한 바운더리가 만들어낸 매직이라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의 부모 밑에서 자란다면 그곳이야 말로 천국이겠구나 싶었다.
언젠가 나의 학생이랑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가 썼던 에세이가 너무 맘 아파서 말이다.
"평생 아빠가 나한테 너 따위가 뭘 하겠냐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 중에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이젠 네가 대학생활이나 제대로 하겠냐고 해요. 그래서 올 에이 받았죠."
그녀를 안아줬다.
"넌 이미 충분히 증명했어. 네가 아버지보다 더 나은 사람이란 걸!"
우린 빈 강의실에서 부둥켜안고 훌쩍였다.
나중에 그 학생은 더 좋은 대학으로 편입을 했다.
또 아버지에게 증명한 샘이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자식인지 증명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자식인지 이미 증명을 받은 아이들이 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자식인지 단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 있다.
삶은 단 한 번도 공평한 적 없었지만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부모만이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매번 옳고 선하고 좋은 선택을 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옳고 선하고 좋은 선택은 어렵고 귀찮다. 하지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게 또 사랑 아니겠는가.
사랑은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