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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Apr 06. 2024

스물한 살 페인트공의 이별

모든 게 불확실해서 사랑도 불안하다.

돈도 넉넉하지 않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데 지하실 공사는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최소한의 재정으로 이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인건비가 매우 비싸기 때문에 혼자 무언가를 고치거나 만들거나 붙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우 유용한 일이다. 다행히도 남편은 그런 손재주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의 웬만한 공사는 그 스스로 한다. (심지어 나중에 천국에서 예수님 만나면 목수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할 정도다)


웬만한 공사를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남편이지만 페인트만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우린 거금 4500불을 들여 사람을 고용하기로 했다. 재작년에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페인트 일을 한다. ( 흥미롭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다.) 둘이 투닥투닥 잘 다투기도 하지만, 일 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해 준다. 나무랄 게 없을 만큼 일을 잘해주는 이 두 사람을 보자니 4년 전 기가 막히게 어이없지만 한편 짠했던 만남이 생각이 났다.


부모님 집을 칠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대학생이 여름방학 동안 알바로 페인트를 하며 학비를 번다는 이를 소개받았다. 여름 내내 페인트칠을 하고 학비를 낸다는 기특한 학생은 게다가 명문대생이라 했다. 남편과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불렀다. 이제 막 21살이 된 앳땐 남자가 이제 막 15살 된 사촌동생을 데리고 우리 집 문 앞에 섰다. 매우 훤칠하고 잘생긴 21살 히스패닉 계통의 학생은 예의도 바르고 일도 참 열심히 했다.  나와 남편은 그런 그들이 너무 귀엽고 보기 좋아서 끼니와 간식 음료까지 매일 챙겨 주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늦기 시작했고 일도 더뎌졌다. 오겠다는 시간보다 몇 시간 더 늦게 오고 아직 공사 중인 벽에 칠을 해버린다.  참다 참다 남편은 폭발을 했고 적반하장으로 21살 페인트공은 화를 낸다. 대학강사 11년 차. 이제 막 스무 살 된 학생들의 말도 안 되는 떼쓰기를 온몸으로 경험해 본 나 아닌가.

"너 밖으로 나와"

강의실이 아닌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빈집에서 학생을 내 사무실로 불러내듯 그렇게 밖으로 나오라 했다.


"뭐가 문제야?"

"....... 자꾸 나한테 화를 내잖아요"

"잘 들어. 여기 학교 아니고 너네 집 아니고 너랑 나랑은 지금 비즈니스 관계야.  그렇지? 나는 너한테 일을 맡겼고 너는 그 일을 하고 돈을 받기로 했어.  분명 우리가 이 벽은 고치고 있는 벽이니까 칠하지 말라고 했고. 그런데 너는 그걸 무시하고 칠했고. 그렇지? 그럼 충분히 우리가 화를 낼 수 있는 상황 아냐?"

"하지만 화를 내잖아요"

"화를 낼만한 짓을 네가 했잖아"


쫄쫄 쫒아나온 15살 사촌동생은 내게 말했다.

"여자친구랑 어제 헤어져서 저래요"


띠리리....

그 말을 듣자 21살 페인트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18살부터 사귄 여자 친구인데 헤어지자고 하잖아요.  난 일하느라 가보지도 못하는데 얘는 헤어지자고 하고... 흑 차 사고는 나고... 너무 힘들어요"


띠리리....

난 누군가 여긴 어디고 얘는 뭔가 싶은 기분이 막 들지만 안쓰러웠다.

젠장 첫사랑은 원래 그렇게 지랄 맞은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상황이 너무 코미디라.... 우선 내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너 일 계속할 수 있겠어?"

"(계속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아니요."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하자. 우리가 너한테 주기로 했던 돈은 딱 네가 일 한만큼만 줄 거야. 1/3 정도 했으니까 1/3 받는 걸로 하자"

"근데 부탁할 게 있어요."

"뭐?"

"엄마가 우리 데리러 와야 하는데 엄마한테는 내가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일 잘린 거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사정이 생겼다고 해주세요."

이 상황에서도 엄마한테 혼날까 봐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21살 페인트공을 보며 짠했다. 오죽하면 네가 지금 내게 이런 부탁을 할까?

21살 페인트공은 집안에 들어가 물건을 챙겼고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짐을 챙기는 그를 보며 혀를 찬다. 그런 남편에게 살짝 말했다.

"며칠 전에 첫사랑이랑 헤어졌대"

남편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내게 말했다.

"미친 짓 할 만했네. 그래서 차 사고 내고 벽에 칠하고 했구먼..."


21살의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 아니겠는가.

나도 그랬고 남편도 그랬기에 우린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 막 21살 학생의 기특함에 눈이 멀어 일이 복잡하게 꼬였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어머니가 도착했고 나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아이고~ 아들 참 잘 키우셨어요.  21살에 학비 벌겠다고 이렇게 여름방학에 일하는 친구가 어딨 어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차만 고장 나지 않았어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어머니는 나를 향해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자랑스러운 엄마의 미소를 지었고 21살 페인트공은 감사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15살 사촌동생은 한심하다는 듯 형을 봤다. 마치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얼마 전 송아람 작가의 "자꾸 생각나"를 읽었다.

흥미진진한 밀당도 없고 설레는 섹스도 존재하지 않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한 두 남녀의 연애 이야기는 내 인생 아주아주 옛날에 존재했기에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억지로 꺼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재밌었다.  키득키득 거리며 그래그래 연애할 때가 좋을 때야 결혼하고 애 낳아봐~ 라며 꼰대 같은 소리나 하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내가 너무 웃겨서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기만 한 그 시절의 사랑은 불같고 헷갈리고 답답한데 미치게 좋다. 모든 게 불확실해서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매달리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한다. 그런 만남을 여러 번 하다가 어느 순간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불안했던 사랑도 안정을 찾는다.


21살 그 페인트공은 그때 그 사랑 때문에  몸을 뒹굴며 쪽팔려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해봐야 또 다른 사랑도 잘 맞이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나의 모습 이대로 함께 하는 게 편해지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랑은 꼭 잡으면 된다.


그러니까...

쪽팔리는 일들이 생긴다고 한들 사랑은 찐하게 하자.

딱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꼭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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