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그냥 기적이다
그는 화가 나있었고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 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내게 전화를 부탁했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문자를 남겼지만 그 역시 답이 없었다. 화가 난 그를 보는 나는 억울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결국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도 나도 서로 쳐다보며 나는 수화기를 든 체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든 체 말이다.
하지만, 그의 전화기를 울리지 않았고 내가 누른 번호는 신호음이 가지 않았다.
그에게 내가 누른 번호를 알려주자 순간 그의 얼굴은 굳으며 한층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번호... 죽은 제 아내의 번호입니다. 제 기록이 아내의 번호로 등록이 되어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 아내의 모든 기록을 삭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번호도 바꿔주시고요.
그의 슬픈 말투, 눈빛과 한숨에 나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로 반응을 했다. 우린 서로의 오해를 풀었으나 그 오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에 상처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때로는 서로를 향해 실망하고 등을 돌렸을지언정 그 모든 순간이 현재가 아닌 과거가 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느끼는 절망감과 상실감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상실감과 두려움, 절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을 표현한 작가 중 뭉크만큼 깊이 있게 파고든 작가가 있을까 싶다. 그에게 상실은 어머니, 누이, 연인이었고 두려움은 또 다른 누군가를 잃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삶이란 겨우 지탱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뭉크가 그린 Night in St. Cloud는 너무 어두워 형태를 알 수 없는 실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빛이라곤 오직 창문을 통해 들어오지만, 어둑어둑한 방을 환하게 비춰줄 전등은 꺼져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바닥을 비추지만, 그 어두 컴컴한 방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다.
그림 속 남자는 구석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다. 곁에 함께해줄 그 누구도 없이 혼자 밖을 바라보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절하게 외롭고 그 외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 남자와 죽은 아내의 번호를 지워 달라던 그의 얼굴이 겹쳤다.
어릴 적 우리가 읽었던 동화는 늘 공주와 왕자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맺혔고 죽을병에 걸린 주인공도 마법의 약을 마시면 깨끗이 낫곤 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 보니 동화책과 드라마의 해피엔딩은 어른들이 원하는 기적을 담아 전해진 이야기였던 것이다.
기적같이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들려준 동화는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 말하지만 현실은 단 한 번도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아도 살아가게 되는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위로를 찾아낸다. 그게 삶인 것 같다.
모든 게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버티고 견디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것 말이다.
Edvard Munch, Night in St. Clo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