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도 헬린이.
군대 가기 전 마지막 학기. 어김없이 학교 기숙사에 들어왔다. 분주히 짐을 나르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서 보이는 이벽 저 벽에 붙은 노란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헬스장에서 붙인 전단지였다.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기숙사생들에게만 드리는 특별한 기회! 헬스장 등록금의 반 이상을 기숙사에서 지원해 드립니다."
4개월에 30만 원 돈의 절반 이상을 기숙사에서 대신 내준다는 내용의 전단지에 나는 바로 등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도 다이어트는 하고 있었고 군대에서 pt 8번 동작을 하며 숨에 차 훈련에 열외 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긴 싫었다. 군대에서 버틸 체력을 기르고 다이터도 계속할 겸 나는 기숙사 입사 첫날에 바로 헬스장에 등록했다.
하지만 내 운동경험이라곤 집에서 운동 앱이나 유튜브를 보고 따라한 요가와 스트레칭이 전부인 "운동몰라몰라 인간"이었다.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선생님께서 자유시간을 주시면 구령대에 삼삼오오 모여 햇빛을 피하던 아이였다. 체육시간인데 가만히 있다고 선생님이 핀잔을 주시면, 그제야 설렁설렁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며 산책하는 게 하루 운동의 전부이던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집에서 자발적으로 홈트를 하고 결국에 다이어트의 종착지인 헬스장에 등록하다니. 나에게는 21년 인생, 장족의 발전이었다.
헬린이. 헬스+ 어린이.
막 헬스장에 등록한, 혹은 헬스장을 다닌 지 몇 달 되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
운동을 오래 한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표현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새해다짐으로 삼일천하로 헬스장을 다녀본 사람들과는 달리, 헬스장에 발을 들여다본 적도 없는 완전무결한 헬린이 그 자체였다. 헬린이로서 헬스장 첫날의 느낌을 적어보았다.
헬스장에 들어가자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두 가지. 왼편의 바벨들과 오른편의 러닝머신. 왼편엔 우락부락한 덩치의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오른편의 러닝머신에는 헬스장 이름이 쓰인 티와 바지를 입은 아줌마들이 주를 이루었다. 뭔가 누구의 의지가 반영된 게 아닌 자연스레 암묵적으로 나누어진 것만 같은 경계의 사이를 지나 나는 옷을 갈아입으로 샤워실로 향했다.
실로 남들의 헐벗은 맨몸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중학생 이후로 목욕탕을 갈 일도 없었고 더불어 팬데믹까지 겹쳤기에 남들과 내가 서로 헐벗고 다니는 공공장소에 갈 일은 약 5년간 없었다. 옷을 다 벗을 걸 알았음에도 순간 남들 앞에서 맨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게다가 헬스장에서 제공하는 반바지는 수영복처럼 안에 그물 소재가 달려있어 팬티를 벗고 입는 바지였다. 하지만 부끄러운 건 오랜만에 남들 앞에서 다 벗고 입는 그 순간뿐이었지, 운동으로 힘을 다 써버린 1시간 후의 나는 그런 수치심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헬스를 처음 등록했을 때 제공해 주는 무료 피티를 받았다. 트레이너님께서는 내가 어떤 목적으로 운동하는지 뭘 배우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정확히 고관절을 접어 스쿼트 하는 방법과 유튜브로 미리 찾아온 초보자가 해야 할 운동기구들의 사용법을 배웠다.
레그컬, 레그 익스텐션, 렛풀다운...
생각보다 기구를 사용하는 운동은 하기 쉬웠다. 각자 운동하는 부위마다 생긴 게 요상하게 다를 뿐이지 모두 무게추를 들어 올리는 단순한 물리법칙이었다. 근육은 세포가 손상하고 아물게 되면서 더 성장한다. 무거운 무게를 여러 번 들어 근육에 손상을 준 다음 충분한 휴식과 단백질을 통해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기구의 사용법을 배운 후 곧바로 무게를 올려 15번씩 3세트를 진행했다. 20kg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한 세트를 하자 생각보다 할만하다 느껴 바로 5kg를 늘려 진행했다. 근데 너무 힘들었다. 이대로는 3세트까지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다시 무게를 5kg 내려 핀을 한 칸 올려 꽂았다. 처음 온 헬린이가 거만하게 무게를 올릴 생각부터 하다니, 나머지 3개월 동안 헬스장을 꾸준히 다니려면 욕심은 한편에 내려두어야 했다.
근력운동을 했으니 이제 유산소운동을 할 차례. 오른편의 유산소 코너에는 가장 기본적인 러닝머신과 사이클, 그리고 악명 높기로 소문난 천국 직행 계단이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헬린이기에 가장 만만한 러닝머신을 타기 시작했다. 러닝머신은 별 어려울 게 없었다. 30분 동안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문제는 러닝머신을 타고난 뒤였다. 러닝머신을 멈추고 나자 갑자기 눈앞의 기계가 확 나에게 다가오더니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지러움은 러닝머신을 내리고 난 뒤에도 1분간 느껴졌다.
나는 내가 쳇바퀴를 달리는 햄스터라는 걸 깨달았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러닝머신을 타면 사람의 몸은 실제로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위치는 변화지 않는다. 그래서 눈과 뇌는 멈춰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몸은 그렇지 않음으로, 순간 달리기를 멈추면 뇌와 몸 사이에 인지 부조화가 생겨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한강 트랙에서 러닝을 할 때에는 이런 경험이 없어서 당황했다. 무게를 치는 원시적인 원리의 근력운동과는 달리, 기계를 통한 유산소 운동은 멀미에 주의를 요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곧 멀미에 적응하기는 했지만, 과연 내 의지가 아닌 기계가 원하는 속도에 내 발을 맞춰 적응했다는 사실은 과연 기뻐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렇게 내 헬스장의 첫날은 끝났다. 샤워를 하고 개운한 마음로 문을 나오며, 다음날 혹은 다다음날에 다시 그 문을 열고 키호스크에 내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들어올 내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헬스장을 다니는 가장 큰 목적은 운동하는 습관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돈을 썼으니 뽕도 뽑아야 하고 탄탄한 몸매와 근육을 가꾸는 것도 물론 목적이지만 매일 몸을 움직이고 꾸준히 운동하는 것. 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이다. 앞으로 헬스장을 다니며 어떤 에피소드가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