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3 짧은 소설 11회차
수현과의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면서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졌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주변은 고요했고,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다 말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마음속에서 그렇게 부정했지만,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은 점점 선명해졌다.
“지은 언니 맞죠?”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내 앞에 서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언니... 제발, 저희 좀 살려주세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내뱉었다.
“왜 왔어? 싫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가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희 지금 대회도 못 나가고 있어요. 아님 탄원서에 이름이라도 써줘요.”
탄원서. 대회. 모든 단어가 나와는 상관없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나는 여전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졌고, 말은 더 쏟아졌다.
“저희 졸업인데 이번에 안 되면 큰일 난다고요! 언니는 언니밖에 모르죠? 저흰 이 문제 때문에 정말 답답해요. 며칠째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다고요. 옛날에 그렇게 겪어놓고도 어떻게 변한 게 없으세요?”
옛날. 그 단어가 머릿속을 강하게 때렸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녀의 말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인생은 뭐가 되는데?”
내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담긴 감정은 날것 그대로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때 모욕적인 말을 들은 나는 뭐가 되는데?”
현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나만 아니면 된다야? 나한테만 피해 안 가면 된다야?”
그 말이 끝나자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돌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 그 목소리가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진 도로를 따라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을 이유가 있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 뒤로 내내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만이 날 붙들었다.
현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의 간절한 표정과 무릎을 꿇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흔들리면 안 된다고,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괜찮아, 이건 옳은 일이야.”
나지막한 독백은 공기 중으로 사라졌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보이는 건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그래도 그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길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