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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Nov 12. 2024

스무 살의 사랑, 스무 살의 낭만

사랑을 쫓으며 사는 건 낭만적인 일이야

-음 작가님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려봐도 될까요?

-와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가요?

-사실 저도 살아가면서 꽤나 오래 고민을 했던 질문이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요. 근데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걸요?

-굉장히 까다로울 것 같네요... 뭔가요?

-작가님의 마음속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내 마음속에 사랑이란?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먼저 말해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나는 사랑을 ‘마음을 내어줄 용기’라고 정의해보고 싶다.


    아직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전 연인의 기억을 지우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며 연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는 행복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되찾을수록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들을 지우기 싫어하게 되고, 결국 그들은 지긋지긋하지만 이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속는 셈 치고 사랑을 믿어볼까 했던 영화’라는 감상평처럼, 사랑은 결국 우리에게 슬픔과 상실감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은 계속 사랑을 한다. <이터널 선샤인>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뭔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사이. 내 모든 것을 포용해 줄 사람이라는 정의가 ‘사랑’ 일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고, 이 영화 또한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다.     

    사실 공감이 된다. 공감이 되면서도 뭔가 쓸쓸하고 무서웠다. 사랑이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머리로 하는 것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건을 따지고, 내가 얻을 득실을 따져보게 되니까. 결국 ‘사람 자체’를 온전히 사랑해 본 경험이 있을지 싶기도 하다.

 

    처음엔 ‘낯선 이’에서 ‘가까운 이’가 되고, ‘둘도 없는 사이’에서 ‘그저 편한 사이’가 되는 것이 인간관계일지도 모르겠다. ‘둘도 없는 사이’에만 머무르는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 결국 나 혼자 우뚝 홀로 서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랑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질리고, 슬슬 공허해진 그 감정 속에서도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서로의 바닥을 보고도 신뢰를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도박이지만, 그 어려운 도박에 자신의 감정을 걸고 나설 용기 자체도 ‘사랑’ 일 테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이터널 선샤인>은 다시 보고 싶다. 아직 스무 살인 내가 생각하는 사랑, 그리고 서른, 혹은 쉰의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어떤 차이점이 생길까. 그때 나의 ‘사랑’은 곁에 있을까. ‘속는 셈 치고 사람을 믿는다’ 결국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남녀도, 부모도, 자식도. 자식은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다. 때로는 부모님이 자식을 미워할 정도의 행위를 하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동안 부모님은 그냥 ‘속는 셈’ 치고 자식에게 자신의 믿음을, 한 번의 기회를 더 걸었던 것이 아닐까.


    <이터널 선샤인>에서 남녀 모두 각자 서로의 욕을 들었고, 여자가 마지막에 ‘나는 완벽하지 않아’라고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그 둘은 다시 그 질리고 환장하는 ‘사랑’을 이어가기를 선택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그냥 내가,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렇듯,

    내어준 마음이 찢기고 갈려 돌아와도

    그 마음을 다시 내어줄 용기가 있다면

    ‘사랑’이다.          


    위의 정의를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과연 ‘사랑’을 해 보았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주었지만, 그 예뻤던 마음이 찢겨 돌아왔을 때 선뜻 그 마음을 다시 내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마음의 문을 닫을 준비를 한 채로, 얼굴은 웃고 있을지언정 그 상대를 전처럼 ‘신뢰’할 용기가 없었다.     

    어리고 미숙했던 때이긴 했지만, 연애를 했을 때에도, 아니면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의문을 늘 가졌던 것 같다.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왜지?’라는 의문도 많이 가졌었고, 내가 이 사람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거창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놓친 인연들도 많았다.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세 번째 만남에서 상대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 ‘국룰’이라는 것을 듣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이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사랑일까, 정말 좋아해서 나의 시간과 마음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것일까 싶다가도 행복하게 잘 만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이런 연애를 할 수 있을까?’ 혹은 ‘나도 나중에 이런 연애를 하게 될까?’라는 의문을 수도 없이 품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뭔데?’ 그냥 잘 연애하고 살면 되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깊은 생각을 할까 싶다가도 나는 그 관계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아까 내렸던 정의는 사랑을 너무 깊은 관계로 생각한 것 같긴 한데, 많은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사랑은 ‘설렘이다’ 사랑은 ‘믿음이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다’라는 답이 나왔다. 결국 내 의미는 정말 사랑의 막바지, 결국 모든 설렘이 끝난 이후에 신뢰와 믿음으로, 어쩌면 익숙함으로 진행되는 단계에서의 정의가 아닐까. 그래서 이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며 나는 내가 사랑에 대해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매 순간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랑이 아닐까? 그동안 사랑에 대해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서 선뜻 사랑을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관계는 가벼운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너무 거창한 ‘사랑’의 정의 속에 나를 가두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랑을 두 가지로 정의하기로 했다.      


    매 순간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돌아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첫 번째 정의를 내렸지만, 아직 나의 두 번째 정의를 포기하지는 못하겠다. 아직 사랑이 주는 낭만을 쫓으며 나의 마음을 한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을 해보고 싶기에.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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