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없이 강한 우리 딸
❚넓고 멀리 보는 엄마표 영어 Type A 버전
우리말 책이든 영어책이든 그 꿀맛을 아는 둘째는 요즘도 자발적 영어책 읽기를 즐겨 한다. 물건 사달라고 조르는 법이 없는 둘째가 유일하게 나에게 사달라고 하는 아이템은 딱 정해져있다.
농구공
농구화
그리고 영어책
눈 뜨면 NBA 농구를 시청하고 오전 30분간 영어 원서 독해 문제집 & 우리말 독해 문제집을 풀고는 점심 먹고 농구 하러 밖에 나가서는 오후 수학학원 잠시 들러 저녁이나 되어야 집에 온다. 그리고 저녁 먹고 1시간 핸드폰 게임 열중하고 샤워 후 9시 30분 경부터는 ‘핸드폰 없는 시간’이 시작된다. 그럼, 저절로 아무 책이라도 손에 든다. 요 며칠은 핸드폰 게임보다 <The Heroes of Olympus series>에 더 빠져들어 있다. 시리즈 중 3번째 책만 없어서 지난 주에 주문을 해줬다. 해외 배송이라 대략 4일 정도가 걸리자, 아들은 인터넷에서 pdf파일을 찾아다 그걸 며칠간 읽을 만큼 열성이었다.
그런 판타지가 나의 취향이 아니라 전혀 책에 관한 토크를 나누지는 못 했지만, 사달라는 책은 늘 잊지 않고 바로 사주는 정도의 역할 만 할 뿐이다. 올해 중3이 되는 둘째의 영어는 제법 본 궤도에 올라 있다.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영어 책을 읽어 줬고 그 맛을 알게 해준 덕분에 둘째의 영어 물결은 그렇게 찬찬히 흐르게 된 것 같다.
❚넓고 멀리 보는 엄마표 영어 Type B 버전
아들보다 세 살 위인 딸에게도 어릴 적부터 영어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의 딸이라 사실 많은 책들을 읽어주진 못 했다. 그저 언어적 감각이 천천히 발달하는 딸을 차분히 지켜봐 줄 뿐, 책을 억지로 읽자고 강요하진 않았다. 미국에서 머문 5년 동안 딸의 독서 취미는 별로 생기지 않았다.
정착 초기에 대부분 이민자 아이들은 영어가 서툴러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지 못 하고 대신 영어책을 친구삼는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 둘째도 그런 편이었다. 나중에 영어가 많이 편해지면서 친구관계도 적극적으로 되긴 했다. 하지만 첫째는 정착 초기도 마지막 해도 그렇게 남들처럼 영어 책을 친구 삼는 다거나 친구 관계를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미국 생활 첫 해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에서 딸을 많이 도와준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마지막 해까지도 거의 유일한 절친이었지만 그 아이는 다른 공립학교를 다녔다. 우리 딸이 다니던 학교는 미국 백인들만 다니던 교회 소속 학교였다. 우리 딸이 유일한 아시안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든 딸은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말 수도 없는 편이라 학교 생활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듯 했다.
모든 것이 영어로 진행되는 (미국 학교니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학교 공부를 혼자 힘으로 감당하지를 못 했다. 저녁이면 항상 딸의 책상 옆에 앉아서 학교 공부를 봐줬다. 과제물 같은 경우도 다들 미국 현지 아이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만 우리 딸에게는 늘 버거웠다.
미국 거주 첫 해에도 초4학년의 공부가 딸에게는 높은 허들이었다. 수학의 모든 도형을 영어로 외워야 하는 날, 매주 치는 20개 영어 단어 시험은 이제 겨우 영어 한 두 문장 읽는 수준의 아이가 영영풀이가 잔뜩 있는 우리나라 고1수준의 영어 단어리스트를 외워야하는 꼴이다. 그렇게 시작된 딸의 영어 여정은 5년의 거주 기간 내내 가속도가 붙질 않았다. 학년이 올라 갈 때 마다 또 그 만큼 높아진 허들이 주어졌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헤쳐 나가질 못 했다.
5년의 미국 거주 경험은 딸 아이의 영어 실력을 자동으로 키워주지는 못 했다. 아이의 성향과 주어진 학습 난이도는 아이의 영어 발달에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 못 했다.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세 살 어린 동생보다 누나의 영어 실력은 많이 뒤쳐져 있었다. 딸의 수능 영어 실력은 아들보다 나쁘다. 남들은 5년의 미국 거주면 1등급이 당상이라 생각한다. 다들 “니 얘들은 영어 걱정 없겠네!”하며 부러워 한다. 하지만 천천히 커가는 딸 아이의 영어실력은 사실 지금도 찬찬히 쌓아나가고 있다.
❚정말 괜찮은 듯
이제는 딸아이 책상 옆에 나란히 앉아서 일일이 봐주는 시기는 지났다. 어느 날 딸이 혼자 2023학년도 수능 영어를 자기 방에서 풀어보고는 나에게 조용히 왔다. 이미 동생은 거의 만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였고, 자기 실력은 어떤지 알아보려고 자기도 한 번 푸어 본 거였다. 물론 딸 아이는 겨우 2등급 턱걸이를 하는 정도 실력이다. 어떨 때는 3등급으로 삐끗할 때도 있다. 아직 딸의 영어 실력은 단단하게 자리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동생보다 못 한 성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표정은 담담하다. 그리고 나에게 정말 괜찮은 듯이 묻는다.
“엄마, 어떻게 하면 빨리 영어 지문을 읽어 내려갈 수 있어?”
”나는 시간이 너무 모자라. 그리고 맞춘 문제도 사실 어떤 건 무슨 소린 지 모르겠어.”
딸의 하소연은 비단 우리 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모든 수능 수험생들에게 그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미국 대학교 원서에서 출제되는 높은 난이도가 문제다.
“책을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빨리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책을 많이 안 읽은 사람은 영어 어휘도 많이 모자라니까 빠른 독해가 될 수 없지.”
“그럼 어떻게 해?”
“1. 이제 매일 독해 지문을 시간제한을 두고 풀어.
2. 지문을 한 줄 한 줄 분석하지 말고 단락을 한 덩어리로 보고 다음 두 물음을 던져.
About What? - Topic(소재) 찾기
So What? - Main idea (주제) 알아내기
3. 지문 안에서 모르는 단어 형광펜 칠해.
4. 온라인 영영사전 찾아 그 의미 파악하고 사전에 나열 된 예문들을 눈으로 쭉 읽어.
5. 매일 독해 지문에 형광펜 칠한 단어를 지문의 내용과 연결지으며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어."
그리고 문항 중 어려운 문항 하나를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해줬다.
❚큰 파도 앞에서도 의연함
이젠 딸을 더 이상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못 된다. 이제는 정말 혼자서 꿋꿋이 해 나가야 하는 길 밖에 없다. 늘 딸아이에게 밀려오는 파도는 높았다. 매 학년을 올라갈 때 마다 해결해가야 할 과제나 학업의 수준은 딸의 역량에 비해 많이 높았다. 미국 첫해도 귀국 후 중3 2학기인 그해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지만 딸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성적이 우수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열심히 쌓아 올리고 나서 느끼는 그 성취감을 조금씩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고3 딸 아이에게 엄마표 영어라 함은 그저 엄마표 영어 코칭 정도이다. 나머지는 그저 딸을 차분히 지켜봐주는 것 뿐이다. 물론 어려운 수능 지문 내용을 이해가 힘들다고 하면 정말 쉬운 말로 핵심 내용을 핵심 단어 위주로 요약해주는 역할은 지금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불안하지 않다. 어제보다 오늘이 작년보다 올해 딸의 영어는 더 나아졌고, 딸 아이의 영어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강하다?
딸이 유일하게 투덜거리는 날은 달달한 간식이 집에 없을 때 뿐 별 투정도 불평도 하지 않는 편이다. 턱 까지 차오르는 공부의 양도 멀리 부모 때문에 갔다 온 해외 살이도 많이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별 소리 없이 그저 묵묵히 견뎌주었다.
오늘 학교에서 일찍 온 딸이 그런다.
”엄마, 보여줄 게 있어.”
“뭐?”
“나 학교에서 상 받았어.”
“뭐? 무슨 상?”
“학력향상 부문 표창장”
“진짜?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 잘 했다고 상 받은 거라고?”
“우리 딸, 대단하다!!”
“(조용히 웃으면서 딸이 말한다) 엄마, 내 성적이 오르긴 올라야 할 성적이었잖아.”
“아무튼, 우리 딸 너무 장하다.”
‘모 아니면 도’인 성격인 나는 아마 그런 상황이면 포기해도 몇 번은 포기했을 법 하다. 그렇지 않으면 멘탈이 다 털려서 부모를 탓하는 세월을 보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은 참 대견할 만큼 단단하다. 정말 소리없이 강하다, 우리 딸.
❚완전 반대지만 서로를 닮아가는 우리
변화가 많은 생활을 견디는 방식에 우리 딸과 나는 참 완전 반대이다. 적극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내가 모르는 부분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최대한 빠른 시일에 효율적으로 변화에 대응하려는 게 내 스타일이다. 영어를 배우는 나의 스타일도 그랬다. 짧고 고집중과 몰입을 통해 일정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딸은 사태가 흐르는 상황을 일단 지켜본다. 모르는 부분을 인내하며 시간이 흘러 저절로 알게 되는 부분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스타일이다. 여유롭게 차분하게 변화에 적응한다. 영어를 배우는 딸의 스타일도 그렇다. 길고 느슨하게 익히며 점진적으로 자신의 영어 수준을 시나브로 올리는 식이다.
이렇게 많이 다른 우리 둘은 엄마와 딸이지만 서로 참 울퉁불퉁한 톱니 바퀴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서로 맞물려 조화롭게 굴러간다. 어쩐 일로 오늘 만큼은 둘이 마음이 통했다. “오늘은 베라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줘야 하는 날이다.” 딸랑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딸의 행복지수는 100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