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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 Soon May 09. 2023

#19. 신기한 우연 2.

: 하필 오늘?

❚아침부터 힘든 주일

중3 아들을 아직까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꼭 안아 준다. 하지만 그 3초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들은 전형적인 사춘기 중3으로 행동한다. 최근 들어 부쩍 고집과 심술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 또 다시 그 심술이 발동했다.      


지난 가을부터 신기할 정도로 군소리 없이 매주 우리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매주 일요일 초등 아이들의 농구 교실에서 아들은 보조 코치로 봉사를 해오고 있다. 물론 정식 감독선생님이 따로 계신다. 그 감독 선생님은 이미 일 년 전부터 아들을 시 대표로 키우려고 정기적으로 대표팀 연습에 아들을 포함시켜 훈련을 시켜주시던 분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선생님이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농구 교실을 오래전부터 맡아 해오셨다고 했다. 너무 신기한 인연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자신감도 키울 겸 그 분께 부탁을 해서 아들을 보조 코치로 써달라 부탁을 드렸다. 마침 손을 다친 상황이신지라 감독 선생님은 아들을 보조 코치로 삼아주셨다. 아들의 호칭은 보조가 빠진 코치이다. 아들에게 그 일은 순전히 본인 즐겁자고 하는 봉사이다. 한국에서 실내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건 제약이 늘 따른다. 기관장의 허락을 맡아야 하거나 담당 교사나 담당자의 허락을 미리 사전에 맡아야 한다. 또는 미리 예약을 해서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가능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매주 일요일 사용할 수 있으니 아들로서는 기꺼이 하는 봉사이다. 최근에는 레슨 시간보다 한 두시간 일찍 가서 혼자 농구를 해도 된다고 까지 허락해주셔서 아들은 그 기회를 백분 활용하고 있다.      


그렇게 신기한 인연을 맺은 교회이기에 나는 당연히 아들이 그 교회 예배에도 더 애착을 갖고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상식선의 생각이지 사춘기 중3의 사고 방식은 아니다. 농구는 농구고 예배 보기 싫은 건 예배 보기 싫은 거다. 둘을 관련시킬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게 아들의 사고방식이다.      


❚심한 마음의 갈등

늘 주일 아침엔 힘이 든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긴다고 해도 남편의 느긋함과 아들의 불평을 온몸으로 인내하고 최대한 예배시간에 덜 늦으려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혼자 홀연히 예배를 보고 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한다. 나를 옭아매는 이러한 관계망이 늘 마음의 에너지를 소모 시킨다.      

“누나는 안 가는데 왜 나만 가야 돼? 누나도 같이 가야지.” 고3인 누나가 함께 가지 않는 것을 핑계로 자기도 안 가려고 떼를 피운다. 고3인 딸에게 예배를 보러 가자고 매주 청하기도 사실 선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늘 밤 12시 넘어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딸이다. 토요일도 학교에 가는 상황인 딸에게 일요일 오전을 교회 예배를 강요하기가 주저스럽다.      

“중간고사도 끝났으면 누나도 오늘은 예배 봐야지!”

“니는 중간고사 끝났다고 실컷 농구하고 하루 종일 놀지만 누나는 고3이라 중간고사 끝나도 놀지 못하고 또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더 이상 할 말을 못 하고 아들은 그저 심술을 부린다. 겨우 차에 올라타서는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 주차장부터는 세상 느린보 걸음으로 우리 뒤를 어기적 어기적 따라 걸어온다. 모른 척 앞장서서 걸으며 한번씩 아들이 오는 지를 체크했다. 교회 건물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아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날씨는 쌀쌀하고 곧 비는 오려는데 얇은 잠바만 걸친 아들이 걱정이 되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비를 핑계삼아 아들을 교회 건물로 오게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걸까? 강요된 예배가 아들에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우리를 위한 설교

참 신기하게도 오늘 설교는 자녀 교육이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기획을 하신 설교라 하신다. 지금 나의 문제에 관해 목사님이 해답을 주신다. 소위 말해 아이의 기를 살리고 아이의 주도권을 키우는 것만을 위한 교육은 올바르지 않다는 결론이다. 겸손하고 신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바로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자녀 양육 방식이라 한다. 자신의 고집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목적이다.      


그 날 아침 아이에게 선택권을 줄 뻔 했다. 너도 고3되면 예배 안 봐도 된다고 말 할 뻔 했다. 심술궂은 아들과 더 이상 대치하기 싫은 마음에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 말을 하면 두고 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딸과 아들은 참 다르다. 아들은 딸에 비해 훨씬 고집이 세고 자신의 논리를 나에게 피력하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스타일이다. 비록 그게 말이 안 될 지라도 일단 자신의 입장을 우기고 보는 편이다. 그런 아들은 나의 10대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그때 하나님을 만났었더라면 요동치는 마음을 위안받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늘 있다. 그래서 딸보다는 아들에게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시키고 싶다. 나의 욕심이지만 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다.      


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여전히 전형적인 사춘기 중학생이다. 그런 아들에게 나의 말도 나의 기도도 크게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주일 일요일 만큼은 예배를 가지 않는 것까지 허용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아들을 차에 태우고 예배를 하러 온 것이었다. 목사님의 말씀이 아들의 귓전에라도 갔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듣지 않았던 것 보다 훨씬 나았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아들을 예배에 데려간 것의 의미를 거기에서 찾았다.      


❚좋아서 하는 일로 장학금 받기

여느 일요일처럼 예배 후 이른 점심을 먹고 아들은 또 그 교회 체육관에 미리 가고 싶어 한다. 예배하러는 그렇게 가기 싫었던 교회였건만 농구를 하기 위해서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미리 간단다. 우리의 상식으로라면 다소 재미가 없더라도 예배를 가고 나서야 그 교회 시설물인 강당을 이용하는 게 좀 더 떳떳할 것 같은데, 아들에게는 그런 일말의 상식도 없는 모양이다.      


더 이상 아들과 왈가왈부 할 것 없이 남편은 아들을 교회로 데려다 주었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교회라 늘 차로 데려다 주는 수고를 남편이 한다. 그리고 체육관으로 간 김에 남편도 아들과 농구를 한다. 평소 대화로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교감을 그나마 농구로 나누려는 남편의 노력이다. 평소처럼 농구교실 시작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 해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담당 집사님이 남편을 불렀다고 한다.      


“늘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해주는 아드님에게 교회에서 소정의 장학금을 주기로 했습니다.”라고 말을 전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 철 없는 아들의 행패에 마음 고생을 좀 한 남편으로서는 하나님의 예고없는 은혜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한다. 농구 교실의 코치로 봉사할 수 있게 하시고 이렇게 철없는 아들에게 은혜로운 선물까지 주시니 나 역시 감사함이 절로 들었다.      


몇 달간 아무런 군말 없이 신기할 만큼 예배를 잘 따라 다니던 아들이 왜 하필 오늘 그렇게 심술을 부린 걸까? 그런 오늘 신기하게도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자녀 교육 방법에 관한 것이 었다. 그리고 그런 오늘 철없는 아들을 위해 자기 좋아서 하는 그 농구 레슨 봉사를 한다고 그렇게 장학금까지 준다고 하니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은 늘 언제나 나의 인지 세계 너머에 있는 듯 하다.     


❚마음의 불평보다 감사가 깃들기를

마음의 불평, 불만이 많았던 나의 십대 모습을 아들은 똑 닮았다. 신을 미워하고 가끔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살아가던 나의 십대의 서글픔을 아들은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삶의 서글픔을 혼자 감내하는 그런 삶을 아들은 살지 말았으면 한다. 삶의 경주를 이리 저리 흔들리며 달리지 않고 하나님을 친구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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