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좋고 물 좋은 나의 어릴 적 고향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청정지역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꼬불길을 따라 한나절 운전을 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그곳은 아직도 신호등이 하나 겨우 있을까 말까 하는 아주 산골 마을이다. 내 친구 아빠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셨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소위 화이트 칼라에 속하는 직업을 가졌다. 어린 내 마음에 나는 그런 아빠가 참 대단해 보였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아빠의 외벌이로는 다섯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 빠듯한 형편인 걸 알게 되었다.
벌이가 좋지 않은 아빠의 직업이지만 2~3년마다 인사이동은 늘 있었다. 아빠의 근무지가 인근으로 발령될 때 빼고 우리 집은 아빠와 함께 이사를 했어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처음으로 낯선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 간 첫 날, 언니도 나도 반 아이들에게 눈이 크다고 놀림을 받아 엉엉 울며 집으로 온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아빠의 직장이 또 이동이 되어 우리는 또 한 번 전학을 가야 했다. 새로운 학교에서의 첫날은 늘 예외 없이 가장 괴로운 날이었다. 특히 5학년이 되던 해 옮겨간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나름 공부를 좀 한다는 이유로 기존 있던 여학생들의 시샘의 대상이 되어 그해 내내 혼자 심심하게 학교 생활을 했었다. 다행히 2년째 되던 해에부터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왕따시킨 한 여자아이는 지금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을 만큼 그 당시 나의 마음의 상처는 꽤 컸던 것 같다.
❚소박한 즐거움
우리가 살던 그 동네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라 인근 지역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버스로 50분 거리에 있는 읍내에는 남자 중학교 하나와 여자 중학교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매일 아침 언니와 나는 새벽밥을 먹고 6시 30분 정도에 떠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한창 잠 많은 나이에 아침 6시만 되면 야속하게 깨워대는 엄마의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른 새벽 그 버스에 올라탄 아이들은 대체로 중, 고등학생들이었고 그 버스는 우리들의 등교를 책임져주는 스쿨 버스가 되는 셈이었다.
힘든 새벽잠을 이기고 같은 버스에 올라탄 우리들은 일종의 동지애가 있었다. 버스의 엔진이 고장이 난 날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방을 벗어던지고 버스 뒤에 몰려가서 차를 밀었던 기억도 있다. 그땐 나와 같은 중1 조무래기들은 그저 먼 말치에서 보고만 있었다. 그 의젓한 고등학교 오빠들이 그 일을 감당했다. 무엇보다 이제 겨우 중1이던 내 눈에 특히 고등학생 선배들은 참 의젓해 보였다. 버스로 등하교 하는 일과는 피곤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상이었다.
❚고집스런 둘째 딸의 근거 없는 자신감
나의 중학교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점심시간에는 잔디밭에 둘러앉아 상추 쌈을 먹곤 했다. 물론 고기가 없이 상추와 쌈장이 전부인 상추 쌈이지만 우리에겐 꿀맛이었다. 토요일에는 버스비로 과자를 다 사 먹고 친구들과 그 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오곤 했다. 학원 수업이 없이 그저 학교 공부가 전부인 우리에게는 놀 수 있는 시간이 참 많았다. 그런 상황이니 조금 만 덜 놀고 공부하면 성적 우수상은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진로에 대한 고민을 좀 더 빨리한 나는 학업에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좀 더 공부에 진지했다.
중2가 될 무렵 나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머물다가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아이가 있는 곳에 가서 나의 역량을 키워야 내 미래가 더 나아질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벌이의 아빠 월급으로 늘 빠듯한 살림에 나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반듯한 직업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둘째인 나는 언니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언니로부터 공부에 관해서 도움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대도시로 전학도 언니와 함께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 혼자라도 떠나야겠다 싶었다.
부모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중학교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홀로 대도시 유학을 고집했다. 결국 차로 5시간 정도 떨어진 대도시로 전학 갔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부모님은 두 살 밑의 여동생을 나와 함께 보냈다. 그 초등학교 교사가 된 여동생은 지금도 자기가 왜 덩달아 전학을 가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그 당시 상황을 웃으며 회고하곤 한다.
당시 사촌들도 대도시로 유학을 와 있었다. 어른 없이 고3 사촌 언니, 고1 사촌 오빠, 중2인 나, 그리고 초6인 내 여동생, 이렇게 네 명은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당시 반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 방이 없어서 초대해줄 수 없다고 하자 그 친구는 꽤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운해 했다. 나는 늘 누구와 방을 공유했어야 했기에 내 방은 세상에 없던 공간이다. 당시 고3인 사촌 언니가 식사를 담당했고 나는 청소를 담당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애처로울 만큼 힘들던 시기였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열심히 살면 더 나은 미래가 반드시 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애늙은이의 인내심
사춘기도 제대로 거치지 않던 어린 나이지만 나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간 이후 꽤 열심히 공부에 몰두한 걸로 기억한다. 반 친구들이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에 열광할 때도 난 그런 곳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아이 다섯의 가난한 집 둘째 딸인 나는 부모님보다는 덜 가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 마음 하나 붙잡고 애늙은이 같이 그 세월을 견딘 거 같다. 주말이면 중3이지만 마치 고3인듯 혼자 공립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오곤 했다. 자리를 뜨지 않고 연속해서 앉아 공부하는 시간을 매번 갱신하는 내기를 나 스스로와 한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정말 한번 앉아서 거의 6시간가량 공부를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패닉 상태의 영어 미아
전학을 간 새 학교는 이전 학교의 거의 세배 정도 학급 수가 많았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 열정을 다해 공부한 덕분에 대부분의 과목은 별 문제 없이 적응을 해나갔다. 그런데, 영어가 골칫덩어리였다. 시골 중학교에서는 나뿐 아니라 모든 반 친구들이 나와 같은 출발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즐겁게 영어를 배워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야 겨우 알파벳을 배웠음에도 나는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어 학원 하나 없는 그런 시골에서는 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영어가 전부였다. 새 학교 첫 영어 시간 나의 영어 실력이 반 친구들에 비해 아주 많이 뒤떨어져 있음을 바로 알게 되었다. 당시 영어 담당이시던 담임 선생님은 반 친구 한 명을 내 영어 도우미로 지정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우리 집은 아주 시골이었고, 외벌이 아버지의 수입으로 다섯 아이를 키우셨다. 살림은 늘 빠듯해 보였다. 영어 학원이나 따로 과외를 받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가족 중에 영어에 관해 도움을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우리 엄마는 영어의 영자도 모른다. 두 살 위의 언니 역시 영어엔 취미가 없었고 그 마저 저 멀리 시골에 있는 형편이다보니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학교가 유일했다. 나름 학교 영어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영어 문법은 나에게 ‘make sense’되지 않았다.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각조각의 문법 지식은 나를 동서남북도 분간 안 되는, 패닉 상태의 영어 미아로 만들어 버렸다.
❚극복 불가 진단
영어 공부를 따라가려고 나 나름대로 용을 썼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고 그저 열심히 했다. 하지만 영어 공부에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세월은 흘렀고 결국 고1 첫 영어 모의고사를 치고 나는 기함을 했다. 100점 만점에 28점이었다. 어떤 시험에서도 결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런 성적이었다. 더군다나 그건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그것도 시골에서 잘해보겠다고 유학씩이나 온 나의 영어 성적이었다. 그 점수는 나에게 엄청난 현실 직시를 시켜주고 말았다.
❚멘탈이 털린 사춘기 소녀
제 아무리 강한 의지의 나였을지라도 그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은 쉽게 헤어나질 못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당시 고1이 될 무렵부터는 사촌 집으로부터 분가를 했다. 그 즘해서 초등 6학년인 남동생도 그 대도시로 전학을 보내기로 부모님들은 결정했다. 애초에 그 아들의 교육을 위해 나를 먼저 보낸 거였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 혼자도 제대로 서지 못하는 지경임에도 내가 책임져야 할 동생이 두 명이나 되었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동생들 도시락도 챙겨줘야 했다. 그 많은 일들을 나 혼자 감당했어야 했다. 학업을 잘 따라가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해내야 할 몫이다. 그 위에 동생들의 보호자 역할까지 해야 하는 그 엄청난 일을 해야 하던 그때 내 나이는 16살이었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헤쳐나가야 할 기본 에너지까지 다 소진이 되버린 상태, 번 아웃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고1 한 해 동안 나는 그저 멘탈이 다 털린 멍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나 스스로에 대한 포부와 남이 나에게 했을 기대, 그 모든 것은 그저 한 때의 이야기일 뿐 그 상태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요원한 일로 변해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는 영양실조에 극심한 시험 불안증으로 학교생활을 정상적으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까지 맞이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그 당시 우리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하지만 멘탈이 붕괴된 딸 아이를 마주하는 엄마의 그 아득한 절망감과 안타까움은 엄마가 된 지금의 나도 참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결국 엄마는 시골에 모든 일을 제치고 나를 챙기기 위해 그 한해 우리와 함께 있어 주었다.
❚문제의 해결책은 내 안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바닥까지 다다랐을 즘 나는 어떻게 할까 혼자 궁리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엄마가 함께 해 준 덕분에 나의 심리 상태도 많이 안정을 찾았고 다시 해보고자 하는 에너지가 샘물 차오르듯 조금씩 올라왔다. 당시 나의 주변에는 학업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거나 가이드를 요청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만 나온 엄마, 늘 직장 때문에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는 아빠, 나와 별다를 바가 없이 영어에 흥미가 없는 언니, 그게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의 리스트였다. 나는 공부에 관한 한 혼자였다.
며칠 전 아들의 기말고사 준비 기간에 공부하는 방법과 계획을 세우는 법에 대해 코칭을 해주었다. 아들이 묻는다. “엄마는 이렇게 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이런 걸 모르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어떻게 해?” “글쎄, 엄마의 엄마는 이런 걸 알려주지 못하셨다. 난 그냥 혼자 시행착오로 터득했지.” “아~, 다음부터는 너도 혼자 시험 계획 짜고 해봐~.” 아들은 영혼 없이 “응~” 한다.
아무튼 나의 학창시절에는 학업에 관한 코칭을 받을 만 한 곳은 없었다.
❚미련스러운 3년간 매일의 루틴
궁여지책으로 학교 앞 서점에 가서 영어 독해 책을 둘러보고, 한 권을 구입했다. 그 후 나와의 약속을 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매일 독해 문제 2개는 풀 다짐했다. 지금 기억으로, 나는 그 다짐을 고3 수능 칠 때까지 어긴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그렇게 매일 열심을 떨며 좌절의 늪을 건넜던 것 같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조금씩 앞으로 이끌었다.
❚불행은 복수~s
그 당시 저조한 영어 성적에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수학 성적이었다. 수학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다. 하지만, 고3이 이제 막 시작될 무렵, 날벼락 같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나의 위안 과목은 더 이상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고2 때까지 수학을 좋아하고 잘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갑자기 도입된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나의 앞길을 막았다. 참 막막했다. 열심히 하면 조금씩 나아지던 영어와 달리, 수학은 타고난 머리가 없었던지, 아니면 암기식 수학을 하던 탓인지, 나의 수학 성적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결국 나는 수학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영어, 나의 플랜 B
어쩔 수 없이, 나는 인생의 플랜 B로 영어를 선택했다. 영어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애초에 싫어했던 영어 과목이었지만, 난 호사스레 투정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앞만 보고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오늘 노력한 만큼 내일 더 나아질 테니 그냥 열심히 달려보자'는 게 내 계획이었다. 비록 수포자(수학포기자)였으나, 나머지 과목은 열심히 했고 약간의 운도 따라주어서 나는 학비가 싼 국립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 간 나름 열심히 해온 영어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나와의 영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