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동고동락
❚영어 교육학과 영어 영문학
맨탈이 다 털린 고등학교 1년,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나의 성적을 위로 끌어 올리기 위해 나머지 고등학교 2년간은 정말 매 순간 최선을 다 한것 같다. 대한민국 수험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법이지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오롯이 목표를 향해 정진해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어린 나이에 당시 나의 집중력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국내의 최고 대학을 갔더라면 나의 그 집중력은 자타가 공인할 법 하나, 안타깝게도 나는 국내 최고 대학이 아닌 내가 살던 도시의 국립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심한 좌절을 감당했어야 한 것이 지금도 마음이 짠 하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 당시의 경험은 그 이후에도 큰 밑걸음이 된 것 같다.
매 수업에 노트 필기며 수업 직후 5분간 복습, 매일의 학습 계획과 루틴, 늘 꼿꼿하게 앉아 공부만 하던 내 모습, 친구들과 할 이야기도 딱히 없이 그저 도를 수행하는 사람마냥 나는 그렇게 공부에만 전념했다. 친구들과 소통이라고는 전혀 할 꺼리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나의 목표를 향해 쭉 나아가는 일상을 살았다.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지금의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며 그렇게 2년을 보냈다. 다행히 고1의 내신 점수의 핸디캡에도 나의 고등학교 내신 등급은 1등급으로 나왔다.
지금은 대학교 수시 모집에 6개 학과를 선택해서 지원할 수 있지만 내가 대입을 치르던 그 당시는 전기대학교에서 한 개 학과만을 선택했어야 했다. 담임 선생님은 문과 1등급인 나에게 당시 문과 중 최고 인기 학과인 영어 교육학과를 추천하셨다. 하지만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어려운 형편에 재수는 꿈도 못 꿀 형편이라 최대한 안전지대를 선택했다. 결국 영어 교육학과 대신 영어 영문학과를 선택했다.
영어 교육학과는 학과의 특성상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공부에만 전념을 한다. 당시 영어 교사 임용고사에는 영어 능력 자체를 측정하는 시험은 아니었다. 그저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는 게 효과적인지에 대한 명시적 지식 자체를 묻는 시험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영어 교사 지망생이라도 영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소 불편한 진실이긴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하지 못 해도 됐었다.
영어 영문학과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한 탐색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 영어를 매개로 다양한 직종으로 취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어 교육학과를 선택했었으면 다양한 진로를 꿈꾸지도 유학을 생각하지도 못 했을 것 같다. 그저 승진을 위한 여러 가지 스펙을 쌓기 위해 애쓰는 교사로 남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영어 전공자에 대한 선입견
영어 교육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영어 영문학과를 전공하기로 마음 먹은 후로 나에게는 큰 콤플렉스가 생겨버렸다. 비록 수학보다 영어에 더 자신이 있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공한다고 내세울 만큼 나의 영어 실력이 대단하거나 영어 소통 능력이 좋다고 보기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어 말하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내신 영어과 수능 영어 시험은 듣기와 읽기가 전부였다. 쓰기와 말하기는 전혀 없었다. 그저 인풋을 하는 영어를 훈련 했지 아웃풋을 하는 영어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당시 자매 결연을 맺은 일본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견학을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성적이 다소 괜찮은 학생들을 선발해서 일본 학생과 일대일로 대화의 시간을 준 적이 있었다.
평생 단 한번도 영어로 말하기를 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영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아주 쑥쓰러웠다. 게다가 내가 하는 말을 그 일본 여학생이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게다가 영어 발음 나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일본 사람인 여학생의 영어 발음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멀쩡한 입을 두고 말 못 하는 사람처럼 종이 한 장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통을 한 웃픈 상황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월, 마음이 급해졌다. 영어 전공자라고 내세우기 부끄러운 나의 영어 실력을 조금이라도 만회해야 겠다 싶어 시내에 있는 영어 회화 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고3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초 영어 회화 특강반에 주저 없이 바로 등록했다.
❚잘 할 때 까지 그리고 좋아질 때 까지
그 회화 특강반을 맡은 분은 한국인 남자 영어 선생님이셨다. 6명 남짓한 고3 학생들이 넓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테이블 앞 쪽에 선생님이 앉으셨고 그 바로 앞에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첫날 각자 자기 소개 및 전공을 말했다. 영어를 전공할 사람은 나 뿐이었고 대부분은 공대 지망생이었고 한 여학생은 불어불문을 전공한다고 했다. 그 여섯 중에 나만 영어를 진지하게 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의 영어 듣기 실력은 그 중에서 제일 꼴찌인 것 같았고 나의 말하기 실력은 그들과 다름이 없었다. 완전 왕초보인 우리에게 선생님은 기본 영어 문장 패턴을 매일 몇 개씩 가르쳐주고 그걸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자동화하도록 연습을 시켰다.
영어 교사인 나로서는 그 당시 그런 영어 수업은 정말 식은 죽 먹기란 생각이 든다. 학생들의 수준은 아주 왕초보이니 따로 교재 연구를 할 것도 없이 수강료를 그저 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당시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의 유학의 꿈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매일 10개 정도의 기본 영어 문장패턴을 입으로 달달 외워 오게 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을 자연스러운 원어민 억양으로 암기 하는 것이 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은 원어민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려가며 반복 연습을 시켰다. 소위 “Shadowing”기법을 소개해주면서 그걸 우리에게 반복 훈련 시켜셨다. 요즘 유튜브에 많은 영어 영상이 이 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롤 쉐도잉을 한 그 때가 1990년대 초반인 걸 생각하면 우리에게 그 기법을 소개한 그 선생님은 상당히 시대를 앞선 분이시란 생각을 한다.
그 선생님은 각 알파벳의 음가를 정확히 발음하는 것에 열의를 가지고 가르쳐주셨다. 한국인으로 절대 쉽게 할 수 없는 /r/ 소리는 며칠을 훈련시킨 것 같다. ‘개구리 알’ 과 개가 으르렁거리는 ‘르르르...’ 같은 소리를 내시며 영어의 /r/소리의 음가에 대한 감을 가지게 해주셨다. 혀를 전체적으로 뒤로 당기고 혀 끝을 살짝 말아 올리는 그 힘든 /r/소리 내기 연습을 틈만 나면 했다. 양치할 때도 세수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의 볼 일 볼 때도 연습했다.
아직은 혀가 굳지 않은 10대였기에 생각보다 원어민의 /r/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이외에도 /l/, /sh/, /th/, /f/, /v/ 등 우리나라 사람에게 힘든 발음을 단어와 문장으로 연습을 많이 하게 했다. 아울러, 쉬운 영어 문장 패턴을 원어민 억양을 쉐도잉하고 직접 소리 내어 읽고 입으로 내뱉으며 암송 하기도 거의 두달 간 매일 같이 연습했다. 한번 하면 끝을 보는 나의 기질이 다시 발동했다. 영어 전공자로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 연습을 아주 열심히 했다.
그렇게 두 달 간 집중적으로 쉐도잉과 문장 패턴 암송을 하니 당연히 나의 영어 발음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신기한 건 왠만한 원어민의 연음, 억양, 음운 변동 사항을 머리가 아닌 입이 기억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영어 회화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도 살짝 나의 발음을 부러워하는 듯 했다. 그 사소한 부러움의 눈빛이 뭐라고 그 덕분에 더 열심히 영어를 즐겁게 익히게 되었다. 그 사소한 게 그 당시 나에게는 영어 공부의 동기였다.
❚영어에 올인한 나의 대학생 시절
정말 단순하게 시작한 나의 영어 말하기 공부는 그렇게 급물살을 타고 급상승해갔다. 영어 전공자들은 음성학이라는 과목을 필수로 듣는다. 영어의 여러 가지 음운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연습하는 과목이다. 그 과목에서 가장 핵심은 영어 단어나 문장을 사전적 발음이 아닌 원어민들이 하는 발음대로 특별한 음성 기호를 사용해서 적고 그것의 음운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외국어로 영어를 배운 우리는 원어민들의 직관이 없기에 원어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발음하는 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쉐도잉과 암송으로 어느 정도 영어의 여러 음운 현상이 이미 입에 익은 나로서는 그 과정이 너무 쉽고 재미있었다.
음성학 뿐 아니라 영어 전공 시간에 배운 영어 음운론, 통사론, 형태론과 같은 학문은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하는 학문이라 무척 관심있게 배웠다. 영어 학습자로서 겪는 외국어 학습자들의 심리적 언어적 발달 단계에 대한 것은 영어 교육학 전공 서적을 통해 좀 더 체계화 하면서 영어 학습의 과정을 학문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공부도 흥미로웠다.
수포자로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나의 플랜 B이었던 영어는 이제 내 인생의 플랜 A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대학 입학 후 서서히 나의 생각을 영어로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어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마지막 해를 제외하고 거의 3년간은 영어 회화 학원을 매일 같이 다닌 것 같다.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다닌 게 아니라 정말로 즐겁게 다녔다. 영어 회화 학원뿐 아니라 영어 뉴스 청취반, 영어 시트콤 반 등 장르를 다양하게 섭력하고 싶어 종류별로 수강했다. 90년대 초반이던 당시 중 고등학생 영어 과외를 해주고 매달 80만원 가량의 학생치고는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의 상당 부분을 영어 학원 수강료로 사용했던 것 같다.
영어 회화 동아리도 대학교 입학 하는 첫 달 바로 가입했다. 공강이 있으면 동아리 방에 가서 영어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영어 스터디, 영어로 발표하기, 영어로 스피치하기, 영어로 회의하기, 영어 연극하기 등 어설프지만 많은 것들을 영어로 해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그 당시 동아리 멤버 중 현재 해외에 거주하는 선배들, 해외 유학을 다녀와 국립대 의대 교수를 하는 친구도 있는 걸 봐서 당시 우리는 영어에 참 진심이었다.
대학생 시절 동안 나는 영어에 올인했다. 나의 영어 공부의 피크를 친 건 바로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대학교 4학년 즘 잠시 인생의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친언니의 소개로 다단계라는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200만원이라는 거금의 빚을 졌지만 다행히 3개월 만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짧은 기간 이지만 당시 사회 생활을 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언니로부터 소개 받은 사기 사건이라 극복하기 힘든 트로마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고 아빠에게 면목이 없긴 했지만 솔직하게 나의 잘못을 토로하고 아빠의 도움을 받아 빚을 갚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순진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 일은 두고두고 내 인생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 사건이 해결은 되었지만 그 일은 나의 자존심에 금을 내기 충분했다. 그 당시 휴학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다음 학기 복학하기 전 몇 달 간은 정말 칩거를 했다. 집에 틀어 박혀 매일 영어 공부만 미친 듯이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대학교 과 친구들은 내가 어학 연수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한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 어학연수긴 하다. 순수 국내파 방구석에서 하는 어학연수를 했으니 말이다. 아침7시부터 9시까지 EBS라디오 방송을 듣고 노트 정리를 했다. 그리고 노트를 달달 암기 했다. 그리고 임귀열의 TOEIC 강의를 공부했다. 당시만 해도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 영어를 잘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휴학을 한 상태인 나로서는 나의 자존감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 영어에 미친 세월을 몇 달간 살았다. 꿈 속에서도 영어로 말 하는 소위 “영어로 꿈꾸기” 도 자주 해봤다. 평생 영어 공부를 하면 참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영어 공부에 미쳐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진로를 결정했다. 돈을 벌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직업, 영어 교사는 내가 갖고 싶은 꿈의 직업이란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때는 영어 교사가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복학 후 높은 경쟁률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임용고시 준비를 위한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 한 가닥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그 당시, 나에게 영어는 그 마지막 한 가닥 지푸라기였다.
❚영어 교사 지망생의 낙제한 영어 시험
그 당시 나는 매일 같이 영어 표현을 외우고 영어로 말하고 영어 듣기 연습을 했다. 그렇게 혼잣말로 하는 영어 공부를 엄청 해대면서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맞이 했다. 대학교 4학년 교사 임용고시를 제대로 준비하기로 결심한 이후부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공부는 끊기로 했다. 즐겁게 하던 영어 회화 공부도 영어 듣기 공부도 영어 교사 시험과는 무관한 능력이기에 모두 뚝 끊어야 했다.
그 즐거운 영어 공부를 하지 못 한 채 그저 영어 교육학이니 영어학 개론이니 영문학 개론이니 하며 시험 대비 암기 공부만을 해야 하는 세월을 살아야 했다. 영어 교사를 뽑는 시험에 영어 능력을 평가하지 않는 그런 모순적인 현실을 의아해 하며 그저 암기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그런 모순을 알아채기나 한 듯이 내가 임용고시를 치던 그해 이례적으로 전공영어 시험은 영어 능력 시험으로 전격 교체가 되었다. 대부분 임용고시 준비생들은 나처럼 영어 공부를 끊은 지 한참 되었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그해 전공 영어 시험은 마치 토플의 리딩 영역과 라이팅 영역과 같은 스타일이 대거 출제 되었다.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 현재 남편이 된 그 사람은 경기도 지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다른 시도와 달리 경기도 교육청은 토익 점수에 가산점을 줬다. 가산점의 메리트를 기대하며 첫 임용 시험은 경기도에 지원했다. 시험 공부를 참 악착같이 했지만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나는 앗차!하는 마음과 함께 합격에 대한 기대는 물 건너 가버리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어 교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나와 같았던지 그 해 영어과 교사 임용은 일정 점수를 못 넘겨 모두 과락이라는 전례 없던 사태를 맞이했다. 뽑으려던 정원을 다 선발하지 못한 대부분 시도는 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월에 다시 영어 교사 임용시험을 치뤘다. 두 번째 도전은 내가 살던 도시에 했고 다행히 합격의 기쁨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주말 연예가 시작되었고 2년 후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기약 없이 주말 부부 생활을 계속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