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많이 달라 보인 사람
❚천국이라 할 만큼
잠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 당시를 그려본다면 그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갔다. 내가 선택한 진로를 위해 내가 하는 공부는 충분히 즐길 만했고 일상 속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관심과 흥미가 비슷했다. 공부도 여가 시간도 함께 나눌 친구들이 많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주변 친구들과 단절을 자처하며 혼자 목표를 향해 열공 모드로 보낸 그 여고생이었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참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영어라는 언어는 나이의 경계를 참 쉽게 허물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한두 해 선배들 정도는 그저 친구처럼 편한 대화를 나누며 지낼 수 있었다. 새로운 언어는 나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시켜 주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새침하기까지 하던 한국어 사용자였던 나는 이제 밝고 경쾌하고 소통을 즐기는 영어 사용자로 바뀌고 있었다. 내가 가는 모임은 모두 영어와 관련된 것들이었기에 나의 새로운 아이디는 이내 모국어를 사용하는 나의 아이디를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대학교는 처음으로 여름 방학을 활용해서 해외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비록 영어권 나라인 캐나다이지만 공교롭게 우리가 어학연수를 하게 될 도시는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는 몬트리올이었다. 하지만 의과 대학교로 유명한 맥길대학교 부설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울 예정이기에 크게 게의 치 않았다. 더 많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고 영어라는 도구를 사용해보고 싶은 갈망이 컸기에 그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평생 처음으로 해외를 가게 되었다. 그 한 달의 어학연수 프로그램은 학점으로 인정이 되었다. 그 연수로 대학교 조기 졸업도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한 학기 등록금을 내는 셈 치고 연수 경비를 보조해주셨다.
❚아주 먼 곳은 처음이라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는 멤티라는 단체 여행이 한창 유행이었던 터라 내 자취 방에도 커다란 배낭은 있었다. 그 큰 배낭에 옷, 화장품, 책, 한국 음식등을 조금씩 밖에 넣지 않았지만 이내 배낭은 한가득 차올랐다. 캐나다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그 커다란 가방을 메고 키 작은 나는 낑낑대며 집을 나섰다.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하지만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 프로그램은 신청자가 대략 30여명이었다. 같은 과 친구 한 명도 함께 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이제나 도착하나 저 제나 도착하나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하늘길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였다. 고도가 높아지자 고막이 아팠던 기억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그 좁은 비행기에서 자다 깨다 먹다가를 정신없이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와 많이 달라 보인 사람
같이 갔던 일행 중에는 제법 친하게 된 한 해 선배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 내 과 친구, 그리고 나는 주말이면 시내 구경을 하곤 했다. 7월 중순이라 캐나다의 날씨도 꽤 더웠다. 우리가 머물던 맥길 대학교 정문 앞을 지날 무렵 멀리서 큰 배낭을 메고 누군가가 손을 크게 흔들면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우리도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해줬다.
20대 중반의 한국 대학생이었다. 그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한창 유행하던 해외 배낭여행을 그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도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일본인 대학생이었다. 다섯 명이 대학교 캠퍼스 잔디밭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 언니와 내 과친구는 그 여대생과 대화를 주로 나누었다. 해외 여행에 한창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그 한국 남학생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일 년 동안 캐나다에서 식당 알바를 하며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제 귀국을 한 달 앞두고 캐나다 횡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많은 기대를 하고 온 첫 해외 경험이지만 일 주일이 지난 무렵 부터 집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늘 동생들과 방을 같이 쓴 나로서는 처음으로 혼자 쓰는 기숙사 방이 너무 싫었다. 어학 연수 프로그램은 참 즐겁고 좋았지만 혼자 있는 저녁 시간은 집을 그립게 만들기 충분했다. 같이 갔던 내 과 친구는 외동딸이어서 혼자 생활을 차분히 잘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 친구 방에 매번 놀러 가기도 눈치가 보였던 터였다. 그런 나에게 그는 참 씩씩하고 당차 보였다.
❚잠시 머문 곳에서 만난 사람
아직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던 그 시절, 정보는 그저 아는 사람들을 통해 얻는 수준이었다. 비록 한 달의 어학 연수가 좀 외로웠지만 그래도 언젠가 1년 정도 어학연수를 위해 다시 해외로 오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런 계획을 위해 그 남학생은 소중한 정보통이었다. 물론 그 남학생의 씩씩함도 많이 닮고 싶었다. 그와 나는 귀국 날짜가 비슷했다. 그는 2학기에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을 한다고 했다. 나 역시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으니 졸업도 비슷한 시기에 할 것 같아 서로 연락처를 나누고 알고 지내는 것이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삐삐로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을 거쳐야 하는 집 전화 대신 바로 당사자들을 연결할 수 있던 삐삐는 참 획기적이었다. 그 먼 타국에서 만났지만 우연하게도그의 고향은 내가 있던 도시와 아주 가까웠다. 나는 그에게 내 삐삐 번호를 알려줬고 귀국 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한 달의 여행이 끝이나고 2학기 개학 날 나에게 삐삐한 통이 왔다. 그가 보내온 번호였다. 그 번호로 전화를 했다. 추석 연휴에 내가 사는 도시로 내려 올 예정이니 그때 얼굴을 보자고 했다. 먼 타지에서 잠시 만난 사람이라 솔직히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만나기로 한 날 정말 내가 기억하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캐나다에서 만났던 그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주말 연애는 6년간 이어졌다.
❚잠시가 아닌 평생 친구
6년의 주말 연애를 끝내고 우리는 부부로 평생 같이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주말 부부를 계속 해야만 했다. 그는 경기도에 살았고 나는 지방에 살았다. 타시도 전출을 신청했지만 결국 그 길을 포기하고 2년 후 남편은 내가 살던 도시로 직종을 변경하며 대대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왔다.
물론 남편의 새로운 도전은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 적응 했고 그가 하던 일도 꽤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아이를 낳아 육아의 고통을 즐겁게 감내하던 세월을 보냈다. 몬트리올에서 만났던 그 멋진 남학생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풋풋하고 도전정신이 많았던 그 여학생도 모두 사진 속 추억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영어 교사로 두 아이의 엄마로 바쁜 일상을 살면서 나는 현실과 제대로 타협을 하고 살고 있었다. 서른에 첫 아이를 출산했다. 서른에 첫 출산은 생물학적으로는 좀 늦은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 고작 서른임에도 내 삶을 더 챙기기보다는 두 아이의 삶을 위해 내 에너지를 바치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성애가 뭔지 나는 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매일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3년의 육아 휴직을 하면서는 더욱 육아에 전념을 하며 ‘나’라는 존재와 ‘내 꿈’은 그저 잊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