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0세 현직 영어 교사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이유

흙수저 주제에 고생을 사기로 했다. 아주 비싸게.

by Hey Soon

❚ 왜 하필 미국 유학이 가고 싶었을까?


아주 시골에서 자란 탓에 중학교에 입학 해서야 비로소 영어 알파벳을 배웠다. 늦은 출발로 나는 영어라는 과목을 무지 힘들어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내내 꽤 열심히 혼자서 영어 공부를 했다. 물론 암호 해독하듯 읽기에만 편중된 공부였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처음으로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영어 말하기 연습을 했다. 심지어 꿈도 영어로 꾸는 날이 많을 만큼 영어에 점점 미쳐갔다. 그리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 나는 평생 영어를 끼고 살았다.


영어 교사 6년 차 무렵, 운 좋게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부설 어학원에서 진행되는 한 달 간 영어 어학 연수에 간 적이 있었다. 잔뜩 기대한 나는 도착한 지 하루 만에 대 실망을 했다. 말이 좋아 샌디에고 주립대학교이지 그 어학원이라는 곳은 대학 캠퍼스 귀퉁이에 위치해 있고 현지 대학생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었다. 나는 자존심마저 상했고, 그 대학교 중심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강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도 잠시, 난 그 이듬해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10년의 세월을 앞뒤 둘러볼 겨를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흘려보냈다. 그 사이 예전의 호기심은 아련해 져버렸다. 여전히 난 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엄마의 죽음은 내 인생을 출렁이게 만들었고 매일 숨만 쉬며 내 삶의 양초를 다 태워버릴까 두려웠다.


영어 교사가 된 지 거의 16년이 끝나갈 무렵 이였다. 문득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사람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유달리 그 해, 반 친구들은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감정의 노동자로 산다는 생각만 들 뿐, 영어 교사로서의 보람은 거의 얻지 못하던 해였다.


그리고 그즈음, 친정 엄마가 아주 많이 아프셨다. 평생 성실 하나로 사시던 분이셨는데 삶에 대한 회의를 통째 안으시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나는 생각 했다. 내가 오늘 하루 살고 내일 하루 살고 그리고 또 그 다음 날을 살고, 살다 살다 세월이 흐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무 특별한 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저 매일 감정의 노동자로 살다가 남은 나의 양초가 다 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난 두려웠다. 나는 매일의 반복되는 그 갇힌 공간에 내 감정 따위는 묵살 되는 그런 시간들을 참아낼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이라는 그 타이틀을 의지하며 평생 갇힌 공간에서 그렇게 매일 숨만 쉬고 양초를 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정년이 보장된 영어 교사였고, 박사 학위가 있다고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구지 고생스럽게 해외 유학을 다녀 온다 해도 내 위치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내가 원하는 것을 해보지 못하고 그저 매일을 살다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싫었다. 차라리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임종의 순간에 한 것 보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다고 했다.


❚ 나는 기어코 나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가 살아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난 더 늦기 전에 몸무림 치고 싶었다. 바깥 세상이 험난해도 나는 기어코 나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가 살아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고, 다시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 예전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던 그 대학교 한 중심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궁금증이 다시 스멀스멀 내 몸을 감쌌다. 나도 그들과 함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구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잠자던 나의 호기심과 잃어가고 있던 배움의 욕구가 다시 솟구쳤다. 평생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그때까지 영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영어로 이메일을 쓴 적도 없었다. 나는 영어를 의미 있게 "사용"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 경험하고 싶었다. 



❚ 세상 구경을 금수저만 하라는 법 있나요?


남편과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일찌감치 딴 나라 구경씩이나 한 터였다. 먼 옛날 나는 캐나다 배낭 여행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런 배경 탓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많은 세상 경험을 시켜주자는 교육관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우린 잠든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용기를 냈다. 그날 저녁 늦은 밤 까지 나는 남편에게 나의 잊혀진 꿈을 말해주었다. 그 대학 한 중심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무언가를 나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을 말이다. 남편은 다시금 그 젊은 시절이 그리운 지 나의 꿈을 지지해줬다. 나는 마흔이였다. 더 이상 미루고, 주저할 수 없는 나이였다. 교사로 지낸 16년간 감정 노동자의 임금을 다 비치고서라도 나는 세상 경험을 사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사서 고생을 하러 가기로 했다.


❚ 고생스러울 게 뻔해도 난 행복했다.


그 날부터 난 행복했었다. 나는 잃어버린 꿈을 되찾은 설렘으로 행복했고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멋진 세상 구경을 시켜 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나는 멋진 나의 인생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TOEFL 시험과 TOEIC 시험을 쳐서 필요한 점수를 얻었고, 미국 대학원 입학에 필수 시험인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시험을 치기 위해 고등학교이후 해 본 적이 없는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필요한 점수를 따고 무사히 미국 남부에 소재한 주립대학교에 영어교육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비싼 값을 치르고 하는 고생임을 난 알고 있었다. 나는 본전 뽑기에 열심인 5년을 보냈다. 두 아이 미국 현지 학교 생활 적응 시키고 내가 다니던 주립 대학교 부설 어학원의 영어 ESL 강사로도 일했다. 그리고 박사 과정 동안에는 아시아학부에 소속되어 한국어 전임 강사로 일했다. 나는 그 5년 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원 없이 실컷 했다. 나는 전력 질주를 하고 난 선수처럼 후련하다.


❚ 나는 고생을 샀다. 아주 비싸게. 그리고 희미한 삶의 밑그림을 그린 듯 하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애쓰시던 친정 엄마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가신 후, 나는 그 빈자리에 서서 마냥 서러워만 할 수 없었다. 대신, 난 세상 구경을 하러 나섰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꿈틀거렸다. 사서한 고생 덕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평생 알지도 못했을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다양한 삶을 보고 왔다. 40대 늦깎이 유학생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세상 경험 제대로 했다. 나는 이전의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나에게 그 시간들과 그 만남들은 내가 찾는 삶의 의미를 희미한 밑그림 이지만 그려주었다. 나는 고생을 샀다. 그것도 아주 아주 비싸게.

미국 현지에서의 나의 출퇴근길- 산은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끝없는 들판길

얼마나 비싸게 한 고생인지 궁금하시죠?

아래 유튜브 영상에서 알아보세요.


위의 글 내용을 Q&A 형식으로 유투브 영상을 만들어 봤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