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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May 02. 2022

점의 활약 - 판화

칸딘스키는 점의 자율적인 힘을 잘 이용하는 분야로 특별히 판화를 꼽습니다. 판화는 회화의 특수분야로 제작에 쓰이는 다양한 도구 덕분에 표현의 가능성 또한 풍성하다는 것이죠. 


태생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생성 과정에 따라 다른 모습과 성질을 갖는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칸딘스키가 점의 서로 다른 양상을 관찰하기 위해 판화의 전형으로 꼽은 것은 동판화(특히 드라이 포인트), 목판화, 석판화 세 종류입니다. 


동판 화법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즐겨 사용되는 것이 바늘을 이용한 드라이 포인트입니다. 바늘이라는 도구가 가진 예리함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묘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어요. 날카로운 바늘의 점은 섬세한 모습으로 일단 동판 위의 음각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감을 판재 위에 두텁게 발라서 오목한 점의 보금자리에 물감이 고이도록 하고 나머지는 닦아냅니다. 프레스의 압력은 가학적이에요. 판재가 종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 가장 오목한 곳에 있는 물감을 묻혀내야 하니까요. 그러면 점은 종이 속에 박히듯 찍혀 나옵니다. 


목판화에서는 점이 될 주변을 도구로 파내야 해요. 이때 점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타내고자 하는 점을 특별히 보호하고 돌보면서 주변을 파내면 드디어 양각의 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감은 점 위에 칠하듯 발라요. 점에 물감이 묻으면 윤곽이 다 드러나 마치 미리보기를 클릭한 것처럼 보이죠. 프레스로 압력을 가할 때는 힘 조절이 중요합니다. 종이가 홈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니까요. 이렇게 물감이 부드럽게 종이 위에 묻어나면 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석판화의 도구는 무궁무진합니다. 펜, 크레용, 붓, 나뭇가지 등부터 심지어는 분무기까지 소집되니까요. 석판화의 점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거나 시간을 소모할 필요 없이 번개처럼 재빨리 생성됩니다. 슬쩍 표면을 스치는 정도에서 끝나버리죠.  


석판화에서 물감은 판재와 결합하거나 고정되지 않도록 유연하게 칠해줍니다. 도색된 물감은 긁기만 해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프레스의 압력도 잠깐 접촉하는 정도에 불과해요. 종이는 무심할 정도로 살짝 전면에만 접촉되지만 배태된 부분만 물감을 받아들여 점은 종이 위에 가볍게 자리 잡습니다. 


무수히 많은 작은 점으로부터 생성되는 커다란 점 (분무 기법)


이처럼 판화의 기법은 여러 측면에서 서로 같을 수 없어요. 이 제작 과정을 칸딘스키의 눈으로 종합해 볼까요? 


“동판화에서는 그 속성이 그러하듯 검은 점이라면 아무리 작아도 손쉽게 이루어지는 반면 크고 하얀 점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갖가지 고도의 기술적 처리에 의해서 완성된다.


목판화 작업은 동판화와 반대이다. 흰 점은 아무리 작아도 한 번의 칼질로 가능한데 크고 검은 점은 많은 노력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석판화에서는 위의 두 방법이 균일하게 조정되어 있어 애써 노력해야 할 부담감이 없다. 


교정의 가능성도 각기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동판화에서는 교정이 불가능하고 목판화에서는 제약이 따르며 석판화에서는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다.”


이러한 비교는 서로 다른 성질을 여실히 드러내기에 서로의 차이점도 쉽게 인식할 수 있어요. 여기에서 한 발 더 내디디면 칸딘스키의 내적 필연성으로 향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차이점을 통하여 감추어진 세계를 들여다보며 사물의 깊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름, 이야말로 내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와 같은 것이죠. 


차이는 자연의 섭리이고 법칙이에요. 너와 내가 다르고, 달라야만 하고, 그래서 관계가 필요하고 형성되는 겁니다. 세상 만물에 고유성이 있다는 칸딘스키의 주장은 어찌 보면 심드렁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와 같은 사실을 잘못 이해한다면, 특히 근본적인 차이를 깨치지 못한다면, 무익하고 거북살스러운 작품만 제작될 거라고 칸딘스키는 장담합니다. 예술가란 투시력과 같은 시각으로 사물의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인식할 줄 아는 능력자여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내면의 세계에 관심이 없거나 아예 거부하는 사람이 있어요. 칸딘스키는 이들을 가리켜 영혼이 텅 비어 있어서 어떤 생명에도 동참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나름의 역할이 있고 생명이 있는데 이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처지인 거죠. 하물며 사물의 심층부까지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재간이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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