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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Nov 28. 2022

'추상'과 불안 감정

감정은 행동을 지배한다. 슬픔, 기쁨, 분노, 불안, 근심, 기대 등등,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감정 중 가장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건 불안 또는 두려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감정에 기대어 존재의 위엄을 과시하는 종교는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세력을 잃을 수 없다. 무엇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속된 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덤비는 이유는 불안이 언제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추상’이라는 단어가 이 불안을 기반으로 태어났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현실이라는 불안을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써 추상이 필요하다면 종교의 역할과 유사한 것 아닌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 Wilhelm Worringer는 1907년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추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는데 우리를 자극하는 것 중에 하나가 추상이라는 거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감정이입의 자극과 추상의 자극, 이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전자는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한 신뢰를 조건으로 하지만, 후자는 외부 현상들로 인하여 인간의 내면이 불안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보링거의 예술 관점은 이렇다. “본래의 예술적 충동은 자연의 모방과 아무 연관도 없다. 그 충동은 단지 어두운 세상 이미지와 혼란한 내부에 대한 유일한 휴식처와 같이 그저 순수 추상을 탐색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술적 충동은 스스로, 본능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창조한다. 이 예술적 충동은 완성된 표현 자체이며 세상 이미지의 모든 시간성과 독단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인간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표현이다.”


이렇게 보링거는 추상의 과정에서 불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역할은 곧바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작품을 지배하는 구도적 이론으로 적용되는데 보링거의 논리가 유심론자와 접신론자 그리고 반물질주의자 등 당시의 예술에 중요한 동력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칸딘스키의 추상은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의 입장과 다르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추상이 세상으로부터 유래된 고유의 본질을 바탕으로 한다면, 칸딘스키는 기존의 세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 그가 추상세계에 눈뜨게 된 일화는 이러한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저녁노을이 막 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물감통을 들고 꽤 오랫동안 지속해온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 그림을 본 순간까지도 ‘내 작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정열로 가득 찬 그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잠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급히 신비로운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 그림에서는 단지 형태와 색깔들만 볼 수 있을 뿐 주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다음날 나는 햇빛 아래에서 전날 받았던 인상을 다시 느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오브제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석양 무렵의 가느다란 빛이 주던 효과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오브제가 오히려 작품에 해를 끼친다고 확신한다.”(「과거에 대한 회상」 P.109, Hermann, Paris, 1974 )


칸딘스키의 추상은 하나의 출현이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것도 없고, 무엇으로부터 파생될 것도 없는, 툭 던져지듯 짠 하고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인 거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로서 고유한 세계를 보유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 추상의 과정이며 동시에 목적이다. 


  

첫 번째 추상 스케치, 1910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감정에 무관심하다. 내 감정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건 진정한 ‘나’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추상 스케치>는 감정에 대한 묘사이다. 흐물거리며 무심하게 스치는 붓 자국은 고정될 수 없는 감정의 흔들림이다. 모든 요소에게는 호흡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고, 적당한 거리두기는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며 지지하기에 모습은 자유 그 자체이다. 있는 그대로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듯 섬세하고 섬약한 울림까지 읽히는 건 수채물감의 효과 덕택이다. 마치 세포가 배양 중인 듯 살랑살랑, 흐느적흐느적, 모두는 분주하기 짝이 없다. 진종일 일하는 우리의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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