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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차 Oct 20. 2024

sugar coat. 사탕 발린 말

빙산의 일각. 마음의 조각. 

작게 올라와있는 빙산, 그것만 보고는 수면 아래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표정, 그 속마음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언니의 표정 뒤에도 무거운 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에 털어놓지 않았다. 그 속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니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신한은행에 빌린 돈이 더 있다고 했다. 

천만 원을 빌렸다고. 이 돈을 빌렸을 때도 사기를 당한 듯 말했다. 

누군가 언니 이름으로 천만 원을 빌려주는 대신 삼백만 원을 받아갔다고 했다.

그 사람은 너는 신용이 없으니 돈을 빌리지 못할 테니, 대신 빌려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수법이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언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삼백만 원의 행방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에 불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돈의 행방을 묻자 언니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뜸을 들이며 말했다. 

수면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금액이 꽤 되었다. 개인이 생활비로 썼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금액이었다. 부모님의 명의로 개통해 받은 휴대폰 값, 불법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돈, 신한 은행에서 빌린 돈까지 하면 대략 2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돈을 왜 그렇게 많이 썼는지 모르겠어" 

언니는 그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이 말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잠깐 휴대폰을 급하게 만지더니, 다시 정신이 나갔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대화 도중 휴대폰을 계속해서 응시하거나, 누군가에게 메신저를 보내는 듯했다. 나는 언니가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꼭 해결하려고 했는데..." 

언니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 어쩌면 겁을 먹은듯한 태도로 정신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서 그냥 확 화류계에서 일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 

이 말을 부모님과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언니는 저런 말을 반복하다가도 이내 차분한 해졌다. 

침묵을 지키며 빌린 돈이 남아있지만, 말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언니가 우리 간을 보며 얼마만큼의 금액을 감당해 줄 것인지를 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긴장감을 계속해서 느끼다 보니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언니가 빌린 금액의 전체 규모를 알고 싶었다. 얼른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빌린 돈이 있냐, 돈 문제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언니는 찔금 찔금 말했다. 금액은 점점 커졌다. 

언니가 얼마만큼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언니가 빠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깊은 외로움을 채워주던 것들.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언니. 

누군가의 사탕발린말. 내가 그 말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진짜 언니의 편은 나라는 것을 믿어줄까. 

우리가 같이 해결할 수 있다고, 그게 가족이라고. 

나는 정체 모를 것에 빠져 버린 언니를 꺼내려 애썼다. 

오랜 시간 설득을 거듭했지만, 결국 언니의 입을 열기는 어려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수도 있다. 평생 남처럼 살던 사람들이,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하라고 하니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언니의 판단력은 13세 정도였으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앞에서 그냥 언니는 달고 맛있는 솜사탕을 주는 사람을 따라가려 하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 설득할 힘이 없었다. 



언제부터 잘못된 것일까. 

1년 전, 나의 치료를 받으며 언니가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걸 알고도 내 치료를 우선으로 한 벌을 받는 것일까?

내 선택이 결국은 나만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선택이었고, 그때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왔을까?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나도 우울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힘이든 나는 엄마와 근처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언니와 대면하는 순간 나는 정말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 가서 엄마와 나는 잠시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막막함, 후회, 죄책감이 뒤섞인 무거운 침묵.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엄마 앞이라 겨우 참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내려와서 큰 도움이 되네" 

침묵을 깨고 엄마가 말했다. 

이 말을 들으니 갑자기 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다. 

그동안 집에 자주 오지 못했던 이유, 나의 우울증에 대해서 엄마에게 말했다.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그날은 내가 어른이 되고 엄마 앞에서 처음 운 날이었다. 

나는 부모님 앞에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적이 없었고, 솔직함 없는 관계의 유효기간은 짧았다. 

이 날의 솔직함으로 상해가기 직전이던 관계에 다시 유예기간을 주게 되었다. 



같은 시각 아빠는 언니에게 호통치며 언니의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한 따뜻함도 아빠의 거친 바람도 언니의 옷깃을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화가 난 아빠는 10시까지 빌린 돈에 대해 쓰라고 종이를 쥐어주었다. 

여기에 모든 것을 쓰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도와주지도, 더 이상 너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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