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과연 얼마를 빌렸을까 ?
나는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혈관이 팽팽해지는 느낌이 들며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나의 우울증을 고백하자 엄마는 비로소 엄마다운 말들을 내게 해주었다.
나는 학생 때부터 엄마가 나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웠고, 그것이 이상할 정도였다고 했다. 이 말이 나를 울렸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고 해결해야 할 사건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에게 이 모든 짐을 지울 순 없는 노릇이니까.
집으로 들어가니 언니는 들쑥날쑥한 필체로 빌린 돈에 대해 적어두었다. 어떤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 어떤 것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기억하는 게 이상했다. 은행, 저축은행뿐만 아니라 다단계로 보이는 돈들도 있었다. '정수기 500만 원' 이런 식으로 적힌 것들이 쭉 있었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액수도 컸지만, 나는 더 이상 언니를 신뢰할 수 없었다. 말이 계속해서 바뀌니 답답하고 지쳤다. 그리고 적은 게 다가 아닐 것 같아 찝찝함을 느꼈다. 언니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버거웠다. 그 공간 전체가 나를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님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부모님과 나는 차를 타고 바람을 쐬러 갔다 오기로 했다.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차에 타서 아빠는 언니와 경찰서에 갔던 때를 회상했다. 언니가 개설한 대포폰, 그 돈을 떼어간 사람을 신고하러 갔을 때였다. 경찰은 다소 과격한 말투로 아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쟤 지금 병원에 넣지 않으면, 곧 범죄자 됩니다."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수법입니다"
"보통 어린아이들이 당하는데 이상하네요..."
당시에는 정신병원에 딸의 발을 묶어 두라는 경찰의 말에 아빠는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으며 아빠는 그 경찰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차에서 부모님과 나는 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 사회와 격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지금 막지 않으면 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부모님은 언니가 경계선 지능인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경계선 지능인에 무지했기 때문에 언니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몰랐다.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때였다.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말했다.
"이모 나 머리가 너무 아파"
이모는 답했다.
"네가 머리가 아플 일이 뭐가 있니?. 네 엄마가 힘들지"
엄마와 이모는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 이모는 늘 엄마 편이었다. 그리고 늘 엄마가 우선순위였다. 이 집안엔 내편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울컥했다. 하지만 난 울컥할 시간이 없었다.
언니는 우리가 나간 사이 이모에게 전화를 했고, 이모는 그런 (나의) 언니를 걱정했다. 언니를 두고 나간 세명을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그 순간 언니가 휴대폰을 보고 이상하게 굴었던 게 생각이 났다. 휴대폰을 보고 나면 갑자기 눈을 떼구르 굴리며 빠르고 경앙된 톤으로 말하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부모님과 내가 자리를 비운게 신천지일지, 사기꾼일지 모를 사람에게는 너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차를 타고 나온 지 십여 분 만에 집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의 휴대폰을 빼앗을 방법을 궁리했다. 아빠가 빼앗으면 반발이 심할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언니와의 신뢰관계가 가장 괜찮다고 판단해, 내가 '잠시 가지고 있겠다'라고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가지고 있기로 정했고, 어떻게 말할지도 생각했지만 혹여나 언니가 강하게 반발할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다.
나는 언니에게 애를 써서 차분히 말했다. 어떤 부분이 걱정되는지, 왜 휴대폰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언니를 지키고 싶기 때문에 한 결정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했다.
"언니 진짜 휴대폰 보지 않고, 가지고만 있을게"
나는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언니는 너무 순순히 나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언니의 순진함에 마음이 또 이상해졌다.
언니의 휴대폰을 지키느라 그날 밤에는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자취를 하면서 그릇을 종종 깨곤 했다.
어떤 그릇은 신기하게 딱 두 동강이 나고, 또 어떤 것은 부서지듯 깨져 파편을 치우기 힘들었다.
후자는 닦아내도 파편이 남아있을 것 같은 불안감에 양말을 열심히 신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의 상황이 꼭 그 그릇의 파편을 치우고 있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