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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희 Sep 14. 2024

70년생 영희의 고향 이야기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우리 언니 시집간다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우리 언니 시집간다. 우리 언니 시집가면 콩 볶아 주꾸마'(영희의 노래)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우리 언니 시집간다. 우리 언니 예쁜 얼굴 분홍치마 다 젖는다. 그래도 비가 오면 천둥번갯불에 콩 볶아 묵는다'(영희친구 경화의 노래)

 

영희가 부르는 비야 비야 노래

  잔칫날이나 소풍 가는 날이 가까워지면  비 오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음률과 가사가 지역에 따라 다르며 같은 곳이라도 상황에 따라 개사된다. 그러나 우리 마을의 비야 비야 노랫말에는 콩 볶아 먹는 얘기가 일관되게 등장한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자료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동그랗고 딱딱한 메주콩을 가마솥에 볶아먹으면 그 고소함이 일품이며 오래 씹어먹을 수 있는 든든한 최고의 간식이었다.


  그날은 7촌 큰 아재가 장가가는 날이다. 7일 전 경북고령으로 가서 딱 한번 맞선을 보고 혼례를 치르게 된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해를 넘기지 말아야 된다 하여 하물며 맞선자리에 정작 봐야 할 시어머니는 제삿날이라 참석 못하고 대신 영희 할머니가 선자리에 다녀온 것이다. 설날이 코앞이 라 일 년 중 가장 바쁜 단대목에 장가까지 가게 되어 그해 우리 마을은 아수라장이었을 것 같다.

  드디어 동지섣달의 맑은 날씨에 잔치가 열렸다. 잔칫집 마당에서 전통혼례식이 치러졌다. 동네사람, 이웃마을사람 십리 밖에서 온 사람들이 다 모여 구경을 하니 장독간이 터져나갈 지경이고 담 너머로 보고 감나무, 밤나무 위에 올라가서도 구경한다. 사람들에 가려져 혼례 순서나 내용은 기억에 거의 없다. 신랑, 신부는 궁중에서만 입는 활옷을 입고 청실홍실이 엮인 실뭉치, 수탉과 암탉, 술,  대나무 화병 등이 있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전통예식이 이루어진다. 혼례가 끝나면 집안 어른들을 순서대로 앉혀놓고 소개를 받고 새색시는 허리가 끊어져라 수십 번 큰절을 올린다. 팔을 잡아주는 웃각시가 옆에서 거들지만 혹시 절을 하다가 넘어질까 그래서 두고두고 구박받을까 걱정하며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도하지 않았을까?

 

  첫 번째 사진은 그날의 폐백 드리는 장면이다. 마당에 자리를 먼저 깔고 그 위에 요를 깔아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그 위로 어른들이 앉아있고 폐백 예물로 번쩍번쩍한 비단 포가 놓여있다. 대추, 밤, 정과와 술잔을 상에 올리고 빨간 한복을 입은 새색시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 절을 하고 있다.  혼주의 사촌들(영희 할아버지 형제들)의 안 어른들에 큰 절 올리는 순서이다. 색시에게는 시부모보다 더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일 것이다. 사촌이 논사면 배 아프다는 그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엄하기로 말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우리 친할머니의 표정은 고된 시집살이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대신 해명하자면, 할머니 당신이 선을 보고 오케이 사인을 했으니 그만큼 더 어깨가 무거웠던 탓이었으리라~

폐백장면 (1979. 1. 22)

 할머니들 뒤로 펼쳐진 혼례병풍의 그림들은  흔히 보이는 그림이지만 보기 드문 구성을 이루고 있다. 부귀영화 목단꽃과 화조도와 금계도 원앙도에 호랑이 그림까지 들어있어 이 세상 길한 것은 다 모아놓은 것 같다. 비록 사진뿐이지만 당시 민가의 간절한 소망을 대변하는 듯 참 귀한 작품이다.

 

  큰방은 집안 어른들이 차지하고, 작은방은 사돈댁 웃각시며 손님들에게 주고 멀리서 온 친지들은 사랑채로 모시고 안 마당은 물론이고 소마굿간과 헛간에도 자리를 깔고 긴 나무상을 쭉쭉 놓았다. 집 안에는 자리가 모자라 대문 앞 배꼬마당에 갑바(천막)를 펴고 긴 나무상에 떡과 묵과 술이 차려진다. 당시 이웃마을 사람들은 대병으로 술한 병씩 들고 인사하러 왔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으면 머릿수만큼  떡국 한 그릇과 잡채, 단술이 배식된다.

  우리 마을은 설날과 잔치 때는 꼭 떡국을 먹는다.  날을 받는 순간부터 음식을 같이 만들고, 떡국을 빼서 말린 후 썰고, 단술과 묵은 친인척집에서 맡고 떡은 당일 새벽에 시루떡을 찐다. 당일은 가마솥은 물론이고 바깥에 솥을 따로 걸어 떡국을 끓이고 하루종일 상을 나르고 설거지를 도우며 손님을 친다(대접한다.). 아이들은 그 틈에 엄마가 뒤로 챙겨주는 음식을 골목 뒤에 숨어서 얻어먹었다. 큰 가마솥에 적당히 잘 퍼진 떡국 한 그릇에 닭꾸미(닭고기 볶은 , 계란지단)를 올린 떡국 한 그릇을 먹고 싶었지만 우리 몫까지 남질 않았다. 잘해야 떡 두어 개 잠긴 닭기름 둥둥 뜬 국물을 마실 수 있었다. 시루떡과 메밀묵만 먹어도 좋았다. 잡채는 잔칫날만 먹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영희가 경화한데 묻는다. "니 잡채 뭇나? 아니 나는 아직 못 뭇다...' 비록 한 젓가락 두 젓가락이 끝이지만 먹으면 다행이고 못 먹어도 맨날 잔칫날이길 바랐다.


 다음 사진들은 1972년 1월 10일, 우리 마을에  '새색시 시집오는 날'의 장면이다. 혼자 앉으신 할머니는 40세에 남편을 잃고 50세에 큰아들과 큰며느리를 연달아 먼저 보낸 후 남은 세 손주를 홀로 키워 그 장손이 장가를 가서,  장손 며느리가 올리는 큰 절을 받고 술을 드시고 계신다. 그날은 아마도 온 마을이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애환의 눈물바다가 아니었을까?  

아내가 시집온 날 (1972년 1월 10일, 사진제공 이배희)
할머니께 절하고 술 올림 (1972년 1월 10일, 사진제공 이배희)
종증조부님께  인사 ((1972년 1월 10일, 사진제공 이배희)

  예단함 위로 이불보따리가 올려져 있고 모시를 비롯한 포목보따리가 상위에 음식과 함께 올려져 있다. 당시 할머니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예식은 부산에서 올리고 이틀 뒤 마을에서 다시 잔치를 벌인 것이다.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의 모습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 구경하는 바가지 머리(집에서 바가지를 씌우고 가위로 자르는 머리스타일)를 한 아이의 얼굴이 예쁘고 정겹다. 우리 마을 여자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이 다 똑같았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이배희 씨는  9급 공무원을 시작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직급인 1급 관리관을 지내고 정년퇴직을 하여 지금은 섹소포니스트로 사회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마을의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신혼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를 부산으로 모시고 가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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