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놀이의 본질은 '재미'다. 놀고 싶다는 욕구에 의한 자발적인 행위이자 언제나 그만둘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놀이마다 노는 때와 장소가 있고 '우리들 만'의 규칙안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행하며 놀이공동체를 형성한다. 놀이는 생활 속 의무에서 벗어나 만족감을 얻는 무사무욕의 행위이다. -요한 하위징아-
우리 '깔레'할래?
'깔레하기'는 우리 마을의 공기놀이다. 도시에 사는 동갑내기 사촌이 놀러 와서 플라스틱으로 된 공기를 보여주었을 때 알록달록하고 소리까지 나서 참 신기했다. 다섯 개로 하는 공기놀이 상대가 되어주었지만 영희는 그 플라스틱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고 가벼워 날리는 느낌인 데다가 몇 번만 던지면 뚜껑이 열려 속에 있는 쇳가루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사촌에게 우리 동네 깔레를 하러 가자 하여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놀이는 주위에 있는 깔레(작은 돌)를 주워 모으는 것부터 시작한다. 각자 윗옷의 앞섶에 깔레를 가득 담아와서 중간에 수북하게 쌓는다. 먼저 예쁘고 단단한 돌 두 개(찌끼미)를 각자 고른 후 편을 가르고 교대로 앉아 돌아가며 한 명씩 깔레를 한다.
찌끼미 돌 두 개를 손바닥에서 손등에 돌을 던져 올린다. 그중 돌 하나는 중지 쪽으로 조심해서 움직여 더미를 향해 잘 조준하여 팔의 반동을 이용해 힘껏 돌을 던져 더미를 깨고 나머지 하나는 위로 던졌다가 다시 받는다. 이때 파괴력이 중요한데 깔레가 많이 흩어질수록 유리하고 특히 내 찌끼미 돌이 더미 밖으로 잘 빠져나와야 한다. 손에 남은 돌로 두 번 던졌다 받으면서 내 찌끼미 돌을 회수해야 하는데 그때 다른 돌들을 같이 움켜쥐고 던진 돌을 무사히 받으면 내가 딴 돌이 된다. 죽을 때까지 하던 사람이 계속하는데 죽는 경우는 다른 돌을 건드리거나 찌끼미 돌을 놓치는 경우이다. 만약 깔레더미를 깰 때 내 찌끼미 돌이 더미 속에 같이 묻히게 되면 다른 돌을 건드리지 않고 빼낼 수 없으므로 내 차례는 건너뛸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일 때 다른 편은 내 돌이 최대한 못 빠져나오도록 더미의 다른 방향을 공략할 것이고, 반대로 우리 편은 내 돌이 빠져나올 전략을 짜면서 더미를 깰 것이다. 이렇듯 깔레는 개인의 손기술과 요령이 필요하지만 팀워크가 매우 중요한 놀이다. 처음 모아 놓았던 돌이 다 없어지면 경기는 끝나게 되고 돌을 많이 딴 편이 이기는 것이다. 같은 편이 딴 깔레를 한 곳에 모으고 개수를 세는데 그 방법은 '이 사 육에 팔에 십' 이렇게 두 개씩 묶어 세고 열개씩 무더기로 만들어 최종 무더기 수를 비교하면 쉽게 승부를 가릴 수 있었다. 보통 백개이상 딴 팀이 이겼던 것 같다. 진 팀에 대한 벌칙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두 세상 진지하고 치열하게 놀이에 임한다. 손이 깔레에 닿았다 아니다 욱신 각신하기도 하고 맨손으로 땅을 쓸고 흙을 후후 불어가며 하나라도 더 따가려는 요령도 부리게 된다. 게임에 지는 날은 잠자리에 누워도 그날의 결정적인 폐착장면이 떠올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의' 할 사람 요요 붙어라~
'의'는 방언사전에서도 찾기 어려운 단어이나 우리 마을에선 흔히 쓰는 말이다. '으~이'를 줄인 말로 누군가를 조금 낮춰 부르는 말이다. 특히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여보' 대신 많이 쓰는 호칭이었고, 우리는 의놀이(집단 숨바꼭질)에서 썼다. 고학년 남자아이 중에 누군가가 주도하여 "오늘 밤에 '의' 할 사람 요요 붙어라~" 하고 엄지를 치켜세우면 그 위로 너도나도 다닥다닥 손을 붙여 손가락 탑이 쌓인다. 의를 하는 날은 대체로 마을 어른들이 단체 관광을 다녀오신 날이나 정월대보름, 명절 전날 등 마을 전체가 일찍 잠들지 않는 날이 안성맞춤이었다. 남자와 여자아이가 같이하는 놀이이며 어린 동생도 같이 한다고 떼를 쓰면 마지못해 데리고 할 수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어둑 컴컴할 때 마을 앞 배꼬마당에 모여 두 편을 나누어 한 팀은 숨고 한 팀은 술래가 된다. 마을 전체 어디든 숨을 수 있다. 각자 흩어져 숨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곳에 숨는다. 길 아래 공굴 밑에 숨기도 하고 어느 집 헛간 깊숙이 들어가 재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소구루마 아래, 또는 짚단 속에 숨기도 했다. 팀의 대장은 숨은 것을 점검하고 '의'하고 외친 후 같이 숨어있으면 술래들은 소리 나는 곳 주위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숨은 곳을 옮기거나 어린 동생들이 부스럭거리면 내면 발각되기 일쑤였다. 너무 오래 못 찾는다 싶으면 "의해라" 하고 요청하기도 했다. 너무 꼭꼭 숨어서 못 찾는 날은 술래들이 찾다가 집으로 가버리기도 하므로 적당히 힌트를 주면서 밀당의 묘미를 발휘해야 한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 달빛아래 꼭꼭 숨은 숨바꼭질은 고도의 인내심과 스릴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작은 잉야~ 똥추마리 해도~
언니, 형을 부르는 호칭이 집집마다 조금씩 달랐다. 우리 집은 언니를 '이야' '잉야'라 불렀고 '엉가'라 부르는 집이 있었다. 형은 '히야' '에야' '세이야' 등으로 부르고 누나는 대부분 '누야'라 불렀다. 형제자매가 많아서 동생을 돌보고 놀아주는 것 그리고 학교에 데리고 가고 보호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생이 아기 때는 이불 위에 누워 다리에 올려 비행기를 태워 주다가 좀 컸을 때 실내에서 놀아주는 것이 '똥추마리'다. 업어주는 자세로 동생키에 맞춰 무릎을 낮춘 후 등 뒤에 선 동생의 목덜미를 왼팔로 감고 허리에 붙여 살짝 들어 올려 오른팔로 다리를 감싸 쥐고 일어서면 동생은 내 허리 뒤쪽에 딱 붙어 옆으로 누운 상태가 된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똥장군' 같아서 그것을 방언으로 '똥추마리'라고 부른다. 동생의 목과 다리를 단단히 쥐고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뱅뱅 돌면 어지러워 비틀거리게 되고 동생은 신나서 까르르 거린다. 다시 반대방향으로 돌면 어지럼이 좀 풀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돈다. 여러 번 돌면 팔에 힘이 빠져 내려주고 싶게 된다. 내릴 때는 그냥 내리지 않고 이불 같은 데다 머리 부분을 먼저 닿게 해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데 똥물을 붓는 시늉을 하고 그때 동생머리는 똥바가지가 된다. 음~냄새야 ~ 하고 내려놓고 도망간다. 그러면 따라오며 또 해줘 또 해줘~하며 괴롭힌다. 그러면 영희는 언니들한테 도움을 요청한다. "큰 잉야~ 작은 잉야~ 그네 태워 도~"하면 언니들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팔고리를 만들고 우리 세 동생은 깍지를 끼고 매달린다. 언니가 빨리 뱅그르르 돌면 우리는 돌다가 손가락이 풀려 내동댕이 쳐져 아프다고 울고 재밌어서 웃는다. 난장판이 될 즈음 할머니의 호통소리에 이불속으로 들어가 키득키득 훌쩍훌쩍거리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빨간 종이 줄까? 노란 종이 줄까?
이야기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단연코 귀신 이야기다. 적당한 긴장감과 과장이 섞여있고 두려움 속에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마당빗자루를 세워두면 귀신이 나온다는 빗자리 귀신, 도깨비불, 달걀귀신, 총각귀신, 처녀귀신, 우물귀신 등 많은 귀신들 중에서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는 벤소(재래식 화장실의 방언) 귀신이야기였다. 이야기하는 언니는 경험담처럼 이야기를 이어간다. 변소에서 볼일을 다 보고 닦으려고 하는 순간 귀신의 활동이 시작된다. (70년대의 우리 집은 누렇게 바랜 책을 한 장씩 뜯어서 뒤처리를 했다. 아랫집은 반듯하게 오린 신문지가 못에 꽂혀있었다.) 밑에서 뻘건 손이 올라오며 질문을 한다. "빨간 종이 줄까? 노란 종이 줄까?" 그때 아래를 보면 절대 안 되는데 봤다 하면 기절하고 정신을 잃으면 귀신이 간을 빼먹는다. 그런데 대답만 잘하면 살아 나올 수 있는데~ 빨간 종이는 피 묻은 종이라서 절대로 고르면 안 된다. 노란 종이도 절대 안 된다. '그러면 무슨 종이 달라해야 되는데?' 하고 우리는 다급해진다. 언니는 이제 귀신처럼 머리카락도 얼굴 앞으로 쓸어내리고 목소리도 무시무시하게 "그러면 파란 종이 줄까? "하고 또 묻는다. 그즈음되면 이미 막내는 울음이 터지고 그다음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고 내일밤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몇 밤을 지나고 나중에 들은 정답은 '흰 종이를 달라고 해야 된다'라고 언니는 가르쳐준다. 아마 언니도 어릴 때 고모들에게 그렇게 많이 당했으리라.
그때 우리가 마을과 학교에서 놀던 많은 놀이들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개뼈다귀, 팔방 뛰기, 꼬리잡기, 고무줄 뛰기, 땅따먹기, 오자미 던지기, 오자미차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때기치기, 자치기, 비사치기, 딱지 따먹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진놀이, 반주깨이 살이(소꿉놀이), 얼음지치기, 비료포대로 눈썰매 타기, 인형옷 입히기, 짝짜꿍( 해는 져서~) 등 그중에서 4개를 고른 이유는 70년대 우리 마을 아이들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담고 있어서이다. 특히 깔레는 다른 곳에는 듣기 힘든 이름이며 더욱이 노는 방법을 기술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참고서적
호모루덴스, 요한하위징아(이종인 역), 연암서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