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옛 영산지도에서 신제는 지금의 새못 저수지의 이름이다. 신제가 있는 동리가 신제리인 것이다. 신제리에 속한 마을 중에 하나인 가지고개('까지꼬'라고 부르고 현재 명칭은 '가현'임.)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05년 영산군 지도에서 신제리와 당포리의 산과 산 사이의 고개 부분에 우리 마을이 위치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다.
지도에서 우리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이다. 1918년 남지 지도와 1924년 영산 지도를 이어 붙이면 가현, 당포, 덕산 세 마을이 보인다. 우리 마을 '가지고개'는 '가지현(加支峴)'으로 표기되었고 덕산과 당포는 지금과 명칭이 같다. 장개 늪을 속기호(速氣湖)로 썼고 덕산과 당포 앞은 큰 저수지와 물웅덩이가 곳곳에 있으며 대부분이 황무지다. 가지고개를 기준으로 양쪽 언덕배기는 황무지이고 산 위쪽으로는 황무지와 침엽수림이 섞여있다. 마을에서 십자둘로 가는 길 중간쯤에 활엽수 한그루가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새못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명리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 한 줄기를 이루어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도로는 영산에서 도천을 지나 가지고개에서 월령으로 연결된 연로(聯路)로 표시되어 있고, 신제에서 내려와 들판을 가로질러 십자둘로 가는 길이 우리 마을 어귀에서 연결되어 송진으로 통한다. 지도는 당시 인근 마을들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우리 마을이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 들판 사이의 점선은 소로(小路)이고 점과 선의 교대선은 면 경계선이다. 가지고개 앞들의 대부분은 도천면에 속해있다.
식민지 통치가 본격화되면서 마을의 토지와 묘지까지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록하고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13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토지도면 중에서 영산읍내면의 도면 19면, 20면, 21면과 도천면의 도면 3장을 이어 붙이면 우리 마을을 완성할 수 있다. 색은 설명을 위해 필자가 임의로 칠하였다.
분홍색을 칠한 곳은 집터(垈)이다. 마을 입구에서 왼쪽 갈색의 398번지는 논(畓)으로 표시되어 있고 연두색으로 칠한 곳들과 마을 앞의 대부분이 밭(田)으로 표기되어 있다. 왼쪽 산 위에 넓은 밭(408번지)의 가운데 갈색을 칠한 409번지는 묘(墓)지이다. 산의 중간중간에 봉분이 표시되어 있다. 마을 중앙의 가는 녹색 띠를 색칠한 389번지와 고개 바로 아래의 390번지는 집터 뒤에 대나무 밭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또 '골짜'라 부르던 우측 372번지는 마을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마을 앞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 앞 버드나무가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우측 갈색 부분의 360번지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임(林) 야인데 언덕(原)으로 표기되었고 그 옆으로 이어진 하천 주위 땅은 모두 임야의 초(草)지로 기록되어 있다. 왼쪽 끝에 분홍색을 칠한 자래덤을 지나면 축구장보다 더 넓은 지역이 대부분이 초지이다. 그곳은 필자가 어릴 때도 저수지가 있었고 주위 논들은 매년 물에 잠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을 앞에 수량이 풍부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주위로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면을 작성한 시점보다 더 옛날 마을 형성기 즈음에는 게도 잡고 배가 드나들었다는 것 또한 풍문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5년 작성된 신제리 묘적대장에는 봉분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그 위치를 표시한 봉분지도를 만들고 각 봉분마다 낱장으로 망자의 이름, 본적, 사인, 제주(祭主)의 정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제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우리 마을 주변으로는 마을 뒷산과 더 아래쪽의 자래덤을 둘러싼 산자락, 그리고 고개 넘어 덕산에 다수의 묘가 분포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산의 등고선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서 가지고개 양 옆 양천(양쪽) 만댕이의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산의 고도가 주변보다 높아서 산꼭대기에 오르면 장개늪 쪽과 도천 영산 들판 쪽의 확 트인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지형임을 확인시켜 준다.
영희가 어릴 때만 해도 봄이면 친구들과 먹을 것을 찾아 매일 산에 올랐다. 핏기, 할미꽃, 아카시아 꽃도 귀한 먹거리였다. 이젠 쉼의 공간으로 남쪽 만댕이까지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새해에는 해맞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의 남쪽 만댕이와 같이 북쪽 만댕이까지 산책로가 이어진다면 해돋이는 물론이고 유서 깊은 장개 늪에 비치는 석양과 함께 해넘이 장관까지 더 멋진 뷰로 즐길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 시대 대부분의 백성들이 그랬듯이 가지고개 동민들도 이름을 드러 내지 않아도 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강제동원과 피 말리는 공출에 등골이 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모두 잊혀가고 있다. 비록 빼어난 산도 이름난 물도 없는 우리 마을이지만 그 시대를 힘겹게 이겨낸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분들이 일구어 낸 마을을 대를 이어 지키고 가꾸어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 세대가 있고 다음 세대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옛 지도에서 '가지고개(加支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 같이 기뻤던 필자의 경험처럼 가지고개의 옛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본다.
참고자료
가현뿌리찾기회 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