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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희 Sep 22. 2024

70년생 영희의 고향 이야기

엄마 아빠의 뜨거운 청춘

  그 시절 우리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은 톰행크스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의 작은 섬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태어나서 살아온 그 좁은 공간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마을에서 싹튼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비일비재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문구는 담벼락이나 전봇대 낙서의 단골메뉴이자 거의 전부였다. 철부지 아이들의 장난 같은 사랑도 있고 가슴깊이 상처를 안겨준 한 맺힌 사랑도 있었다. 때로는 결혼까지 이어져 동네에서 사돈지간을 맺는 경우도 있었고, 집성촌의 특징상 동성동본이라서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헤어지는 겨우도 있었다. 대개는 사춘기 시절 한때의 짝사랑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1961년 2월 10일, 덕산에 살던 18세 영자 씨는 친구와 남지 영미관에서 손을 꼭 잡고 우정사진을 찍었다. 가장 고운 옷을 입고 유행하던 헤어 스타일로 머리를 다듬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가장 예쁜 모습으로 그 순간을 담았을 것이다. 체크무늬 저고리에 꽃무늬 치마는 무슨 색깔일까?  영자씨 인생의 가장 아름다울 때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그날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덕산에서 남지까지 10리 길을 예쁘게 단장하고  친구와 함께 경쾌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뭍 총각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지 않았을까?   

  그날의 소중한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던지 영자씨는 사진의 뒷면에 이렇게 메모해 놓았다. 

4. 2. 9. 4.

2.月. 1.0.日.

남지  미영

해는 단기 4294년으로 쓰고 숫자 하나하나에 콤마를 콕콕 찍고 친구 이름과 함께 기록했다.

18세의 영자씨와 친구 미영씨

  영자씨의 언니와 큰 오라버니는 일본 가서 고등학교를 나올 만큼 엘리트교육을 받았지만 이후 가세가 기울어 43년생 영자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중퇴했다. 마을이나 다름없는 가지고개에 사는 송한씨와 동갑으로 초등학교 3~4년은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가 그렇게 집안 형편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영자씨는 집에서 가마니 짜기를 돕다가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용을 배우겠다고 서울로 올라갔다. 큰 꿈을 품고 몰래 가출을 한 것이다. 아~그때 잡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영희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겠지만 영자 씨는 지금쯤 청담동을 접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6개월 만에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외할아버지한테  잡혀 끌려 내려왔다고 한다. 

  그 이후 아빠와의 본격적인 연애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영자씨와 송한씨

  사진은 언제 찍었는지 적혀있지 않다. 영자씨는 꽃을 들고 미소 짓고 있다. 송한씨의 머리카락 길이로 보아 군대 가기 전 언약식의 의미로 사진을 찍었으리라 추정된다. 

  19세의 송한씨는 당시 귀신 잡는 해병대로 알려진 포항 1사단에 입대한다. 고된 군생활에서 일신이 좀 편한 길은 상사에게 잘 보이는 것뿐일 것이다. '애인 있는 사람 손들어!' 손을 든 송한씨는 불려 나가서 애인의 친구를 소개하라는 명령에 큰 이모를 소개했다. 그 후 군생활이 많이 편해졌고, 결국 우리 외할머니는  큰사위, 둘째 사위를 해병대 출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귀신이나 잡을 것이지 어린 처남 잡을 뻔한 사위들의 장난질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외할머니 46세에 태어난 늦둥이 어린 외삼촌을 두 매형들이 썰매를 태워준다고 장개 늪에 데려갔다. 썰매를 태우다가 얼음이 깨져 셋 다 물에 빠졌는데 해병이라 헤엄을 잘 쳐서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으나 얼음 속에 빠져 꽁꽁 얼어붙은 어린 외삼촌은 생사기로에 섰다. 재빨리 늪 근처 점빵을 하던 황씨집 구들장에 눕혀 응급 처치해서 죽다 살았다고 한다.   

 제대를 앞둔 1965년 9월에 해병대는 1사단 병력을 바탕으로 월남전을 위해 2사단 청룡부대를 창설했고 그해  월남전에 첫 해병대 파병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아빠는 만기 전역 직전이니 차출 명단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참전했더라면 또 우리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1965년 10월 해병대 전역 기념

 그렇게 두 사람은 전역 직후 결혼을 했다. 아빠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해서 결혼사진을 찍지 못했다고 한다. 정확한 결혼일자도 알 수 없으나 전역 일 65년 10월 30일 이후 정확히 10개월 후인 66년 8월 30일에 큰언니가 태어났다. 

 뜨거웠던 엄마 아빠의 연애이야기는 결혼에 골인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14년을 채우지 못한 짧은 결혼생활과 이후 이어지는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생각하면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라도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로 1남 4녀를 얻었고 그중에서 영희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 


 * 故. 강영자 어머니와  故. 신송한(충길) 아버지의 존함을 영자씨와 송한씨로 쓴 것은 '그분들의 고귀한 젊은 시절을 아름답게 지켜드리고자 함'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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