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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희 Sep 12. 2024

70년생 영희의 고향 이야기

할머니의 정지(부엌)

  부엌과 정지는 같은 말이나 지방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우리 지역에선 솥이 걸린 아궁이를 '부스케'라 하고 부뚜막과 부스케가 있는 그곳을  '정지'라 불렀다. 가지고개는 동향의 언덕배기에 터를 잡은 곳이라 집의 안채는 해 뜨는 곳을 바라보고 있고 오른쪽 끝이 정지이고 마루를 건너 왼쪽 끝은 소 여물을 끓이는 부스케(아궁이)가 또 있었다.  

  빗장을 젖히고 정지문을 열면 삐그덕 소리가 난다. 오른쪽 입구에 물을 길어다 부어놓은 큰 물두멍이 놓여있다. 그 위로 찬장이 마루와 연결되어 있어 식사 때는  마루 쪽으로 음식을 넘겨주는 구실을 하고, 다른 때는 반찬과 찐 보리밥덩이를  보관해 두고 미닫이 문을 닫아두는 곳이다.  부뚜막엔 밥 짓는 큰  솥과  그 옆에 국을 끓이거나 제사 때 시루떡을 찌거나 닭을 삶는 등 다용도로 사용되는 작은 솥이  걸려있다. 양념단지 몇 개가 놓여있고 나무 기둥엔 쌀조리, 긴 나무밥주걱이 걸려있다.  왼쪽 낮은 부뚜막에 쌀독과 작은 단지, 약탕기 등이 있고 2단 구조의 실겅 아랫칸에는 스테인리스 그릇이나 유기그릇과 자기 그릇 등을 엎어 보자기로 덮어 놓고, 위칸은  개나리 소반, 할아버지 밥상을 뒤집어 올려 두었다. 소쿠리와 체도 있고  실겅 옆에는 땔감을 쌓아놓았다. 이것이 세간살이의 전부다. 아니 이만큼도 다 갖추지 못한 집이 많아서 체, 약탕기, 떡시루등을 빌리러 왔다.

 정지는 영희에게는 시원한 물과 맛있는 밥과 떡, 누룽지, 고소하고 짭조름한 깨소금이 있는 곳, 그것도 없으면 생쌀도 한 줌 꺼내 씹어 먹어 배를 채울 수 있는 보물창고였고 그곳의 주인인 할머니는 뭐든 잘 만드는 요술사인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정지 (그림. 전새힘)

  할머니에게 저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글이나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애증의 공간일 것이다. 열다섯에 시집온 후 자식 열을 낳고 고된 시집살이의 험지이자 부모, 남편 그리고 달린 식구들과 많은 자식들까지 대가족이 굶지 않게 알뜰히 챙긴 긍지 높은 생활전선이자  농사철에는 오전 오후 중참까지 5끼를  만들어 이고 지고 논에 내야 하는 중노동의 현장이었다. 일 년 열두 번의 제사음식을 하는 곳, 누가 아프면 몇 날 며칠을 부채질해 가며 약을 달이는 곳,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물에서 물을 매일같이 길어다 붓는 일까지 해야 한다. 장 담그고 김장하고 명절음식 만드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그냥의 일상이 그 정도다. 

 아무리 해도 언제나 밥은 모자랐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늘 솥 아래 깔린 보리밥이나 누룽지를 긁어먹었다.

할머니가 양 조절을 못한 게 아니라 보리 수확 할 때까지, 벼 추수할 때까지 도장에 재어있는 곡식은 정해져 있는데 함부로 양을 늘렸다간 모두 빌어먹는 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경영에 민감해야 했다. 밥때가 되면 걸인들이 박 바가지를 들고 동냥을 다닌다. 밥 한 숟가락 주는 며느리를 그렇게 호통치는 맘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할머니 집은 부잣집이라고 해도 그런 사정인데  70년대까지도 여전히 먹고살기는 힘들었었다. 오죽하면


                "신제 일곱 땀과 어리골 처녀는 쌀 3되도 못 묵고 시집을 간다."


는 말이 있다. 신제 일곱 땀이 가지고개를 비롯한 덕산, 당포, 자래덤과 건넛말 중촌, 상촌, 장척 마을을 뜻한다. 지금은 70대, 80대를 훌쩍 넘겼을 당시 고모님, 이모님들 지금은 쌀밥 많이 드시고 계시는지요? 


 영희는 '터 잘 팔아 바로 아래 귀한 남동생이 태어났다'하여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자고 할머니는 반대방향으로 한 이불 덮고 주무셨다. 캄캄한 새벽에 할머니는 제일 먼저 조용히 일어나 깨끗한 찬물 한 그릇 떠서 부뚜막 위 선반에 올려놓고 합장을 한다. 부엌의 조왕신에게 무엇을 비셨을까? 우리 가족의 안녕과 또 꿈에만 그리던 친정 생각과 부모님의 안녕도 비셨으리라~ 


남해대교 관광기념 ( 1983년 )

 사진은 83년 봄, 남해대교 관광 나들이 때 찍은 것으로 노란 개나리 앞에서 우리 마을 할머니들이 포즈를 취하고 계신다. 웃음을 짓지 않으셔도 곱고 곱다. 손수 지은 한복에 저고리 동전을 깨끗하게 갈아 달고 비녀머리를 다듬어 한껏 멋 부린 최고의 날이다. 

 영희의 친할머니는 핑크색 한복에도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풍채 좋은 분이다. 그토록 천하 여장군 같은 분도 3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장남(영희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가 모신 큰할머니는 여린 모습 그대로  옥색 한복을 입고 앉아계신다. 아들 못 낳은 죄, 남편을 35세에 여읜 죄 아닌 중죄인으로 평생 숨죽여 살던 큰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엄마를 무던히 힘들게 하다가 가셨다. 한 번씩 실종되면 친정인 모리 쪽으로 가시다가 길을 잃어 수소문 끝에 멀리 다른 동네에서 모셔오기를 반복했었다. 꿈에 그리던 친정을 그렇게라도 가고 싶으셨으리라~ 

 

 저마다 피맺힌  한을 가슴으로 삼키고  아플 새도 없이 평생을 희생하며 살다 먼저 가신 오갈할매, 해끼할매, 한터할매,  선산할매, 진동할매 사동할매, 서동할매, 사천할매, 배술할매, 어릿골할매, 양산할매, 생질할매, 부산할매.... 모두 우리 마을의 제2세대를 풍미했던 주역들이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고초를 겪고, 6.25 전쟁 당시 피난생활과 보릿고개, 전염병, 물난리도 모두 이겨내며  한평생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손을 번창시킨 애국자 할머니들을 영희는 오늘 기억한다.  유일하게 살아계신 올해로 100세 맞으신 부천할머니의 무병장수를 소망합니다.


참고서적

한국의 부엌, 이주홍, 손동기, 국립민속박물관, 2019

창녕군지명사, 비사벌사회문화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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