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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희 Sep 08. 2024

70년생 영희의 고향 이야기

수양버들의 풍유  

그리운 고향 '까지꼬'를 추억하다

 우리 마 가지고개(사투리로 '까지꼬'라고 부른다.) 영산에서 남쪽으로 넓은 들판 길을 따라 10리쯤 떨어진 곳으로 덕산, 당포, 작포, 월령 사람들이 영산 읍내로 가려면 반드시 넘는 고개였다. 1800년대 중반 경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고갯마루 옆으로 집 지어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고개이름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필자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의 일이니 불과 200년 정도인 규모가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  아름드리 수양버들 두 그루가 있었다. 당산나무보다는 수령이 높지는 않지만 마을을 대표할 만한 입지조건과  멋진 자태를 지닌 나무였다. 봄이 오면 보리밭 위에 연둣빛으로 길게 늘어진 가지에 붙은 꽃과 야들야들한 버들잎은 봄의 전령이었다. 더운 여름엔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넓고 짙은 그늘과 바람을 일으켜 주어 쉼터가 되어주고, 꼭대기는 까치들의 보금자리로 내주었다.


1980년대 초 마을입구에 우뚝 선 수양버들 (사진기증. 이배희) 

 가을, 겨울 추수가 끝난 후 버드나무 가지에 줄을 메서 그네를 달았다. 동네 언니들이 그네를 타는 모습은 기억이 나는데 내가 탔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느 해 그네를 타다가 골짝에 사는 언니가 그네에서 떨어져 논에 처박혀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 뒤로 그네 타기가 중단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까지꼬 수양버들은  우리 마을에만 있는 명물이라 할 만했다. 70년대만 해도 들판 곳곳이나 제방 위 신작로의 가로수로 잎이 넓은 양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  일하다 버드나무 그늘에서 중참을 먹곤 했는데 어느 날 나무가 없어져 물어보니 성냥 만드는 사람한테 주인이  팔았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양버드나무는 일자로 쭉쭉 뻗어 키가 크기도 했지만 바람이 불면 사그락사그락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여 그 존재감은 탁월했다.

영희 기억 속 수양버들 (그림. 전세힘)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마을 바로 앞은 습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영산남지 수리제방공사 후 계성천, 영산천의 물길을 도천천으로 돌린 후  논이 되었지만 그 논들은 물이 많아 모내기할 때 뻘에 푹푹 빠져 걸어 나오기도 어려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제 심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마을 어른들은 고육지책으로 그 자리에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고 많은 버들 중에 하필 수양버들을 애써 골라 심었을까? 옛 문인들의 시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수양버들은 나무의 수형이 아름답고 특히 유려한 가지가 일품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지만 마을로 들어선 초입에 수양버들을 식재한 그분들의 가슴속에 넘치는 '풍류'를 짐작케 한다. 

 누군가는 이별하는 연인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어 아쉬움의 정표가 되었을 것이고, 급하게 우물물 청해 먹는 나그네에게 체하지 않도록 버들잎 띄워주어 배려심을 표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론 버들가지 회초리로 맞아 종아리가 핏 멍들 때는 엄마와 아이모두에게는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베어지고 흔적도 없지만 고향을 기억하는 이들의 맘 속에는 언제나 유들유들한 버들가지를 바람에 살랑이며 할머니처럼 엄마처럼 우리를 맞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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