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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희 Oct 03. 2024

그리운 당산나무에게 ~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2002년 태풍 '루사'가 역대급의 비를 쏟아붓고 지나간 뒤 수많은 사상자가 나고 재산 피해는 천문학적 액수를 기록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 사람들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은  한 해 동안 지은 논밭 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고 집채보다 큰 당산나무가  쓰러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며 뿌리가 땅 위로 솟구치고 가지는 부러져서 도무지 살릴 방법이 없었다. 나무 주위의 흙이 다 쓸려가고 난 뒤 남은 자리에는 온통 바위 투성이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옆으로만 뻗어 120~150년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그 나무를 '당산나무'라 부르지만 우리는 맛난 열매이름을 따서 '팰구나무'라고 불렀다. 어른 두 명은 껴안아야 될 만큼 굵고 튼튼한 팽나무였다. 산언덕 아래에 'ㄷ'자 형태의 2단 석축이 넓게 나무를 감싸고 있었다. 석축 위 나무뿌리 쪽은 흙이지만 끝부분은 시멘트로 반질반질하게 발라서 앉거나 누울 자리가 넉넉하여 논밭에서 일하다가 중참을 먹고 낮잠을 청하는 장소로도 참 좋았다. 특히 한여름에는 우리가 주인이고 대장이 되는 만능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나무 옆 넓적 바위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자갈돌을 숨겨두었다가 꺼내서 공기놀이 하다가  바로 앞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물장난을 하거나 고동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미가 없으면 나무를 타고 놀았다.

 

 나무에 손잡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두꺼운 밑동에서 제법 높은 첫 번째 가지까지 오르는 일은 언니 오빠들에게 전수받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누군가 엉덩이를 받쳐 밀어 올려주면 왼손으로 나무 몸통 위쪽에  움푹 파인 부분에 손을 쭉 뻗어 꽉 잡는다. 왼발은 나무를 강하게 짚고 오른 다리를 올려 첫 번째 가지 위로 다리를 건다. (다리가 짧으면 이 과정이 가능할 때까지 1~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오른쪽 팔에 힘을 주어 몸의 중심을 가지 위로 옮겨 나무에 올라탄다. 처음 몇 번의 시도에서는 나무가 미끄러워 무릎이 까지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나무 위에서 얌전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팰구를 먹으며 놀았지만 남자아이들은 나무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곡예를 하다가 굵은 가지를 기어서  끝까지 가서는 말을 타듯이 나무를 힘껏 굴리며 놀았다. 그럴 때는 나뭇가지가 땅에 쓸렸다가 올랐다가를 반복하니 가지 끝은 말꼬리 같이 마르다가 간혹 뚝 부러지기도 했다. 왠지 그 나무에서는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같다.


영희 마음속에 남은 가지고개 당산나무 (그림. 전새힘)

  그런데  그 나무가 처음부터 당산나무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뒷산에 있던 큰 소나무였는데 그 소나무가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매년 설날과 정월대보름 사이에 좋은 날을 받아 동제를 지냈다. 동제는 우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제사인데 제관은 정해진 순서대로 돌아가며 제를 받들고 한 해 동안 흉사가 난 상가에 가지 않으며 잡다한 금기를 지켜서 마을 주민의 안락을 빌었다. 함께 준비한 음식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 제를 지내는 전통을 계속 이어오다가  어느 해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제관을 맡은 집에 초상이 났고, 같은 해에 그 소나무도 아무 이유 없이 말라죽었다. 그리하여 이듬해부터 마을 남쪽의 팽나무가 당산나무의 지위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그 당산나무는 마을이 생긴 뒤 얼마 안 되어 어른들이 심은 팽나무 세 그루 중의 한 그루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갯마루 양 옆으로 한 그루씩 심고  남쪽 어귀에 한 그루를 심어 우리 마을 가지고개를 알리는 이정표가 되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그곳이 마을 모퉁이 쪽 입구이고 고갯마루는 마을의 뒤편이니 덩치 큰 나무가 마을을 든든하게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고개 쪽에는 토양은 척박하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결국 오른쪽 나무는 죽고 왼쪽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했으나 지금도 그 자리에  꿋꿋이 살고 있다. 그리고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22년째 대를 잇고 있다. 


   크고 오래된 나무를 섬기는 우리 문화를 설득하기 위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단군의 탄생신화'를 굳이 가져와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물론 새와 주위 생태계에  실질적으로 한없이 유익한 존재일 뿐 아니라 같은 땅에 뿌리를 두고 모진 세월을 마을사람들과 함께 견디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나무 그늘에 가면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와 들릴 것 같고 나무를 껴안으면 엄마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지금은 마음속에만 남은 그리운 당산나무야~ 고마워 그리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 죽은 소나무이야기는 신병옥 이장님의 증언을 토대로 썼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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