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영희 Sep 28. 2024

6.25 피난길을 따라가다

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영희의 어린 시절, 학교소풍 장소 중 하나는 영산의 남산 호국공원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영산 시가지와 신제 들판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절벽 위에 도착하고, 그곳에 6.25 전쟁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바다같이 흘렀다'는 선생님의 전투 약사문의 설명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김밥 도시락과 삶은 계란을 까먹던 기억이 선명하다.


  6.25 전쟁 당시에 온 나라가 성한 곳이 없었겠지만 내 고향 주변의 산과 들 그리고 낙동강변은 가장 치열한 접전지 중 하나로 이후 유해 발굴 1호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전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들이 겪은 힘겨운 피난살이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4살이던 이배희 씨의 회고록과 7살이었던 어머니의 기억 그리고 신병화 씨에게 들은 이야기로 전투기록과 날짜를 대조하였고, 피난길은 당시 지도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나름의 경로를 만든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한 달 여만에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이르렀다. 전국토의 80% 이상을 북한군이 차지하고 부산지역 공격을 위하여 막바지 대공세를 준비하던 7월 말 8월 초부터 우리 마을의 피난 이야기는 시작된다. 


   4살 희와 그의 어머니가 방에 있었는데 총과 칼을 든 군인과 경찰들이 와서 전쟁이 났으니 빨리 피난을 가라고 한다. 피난을 가는데 할머니의 손을 잡고 끌리다시피 정신없이 논두렁을 걷다가 고무신 한 짝이 풀에 걸려 벗겨졌다."할머니, 내 신발이 벗겨졌다."  할머니는 희의 손을 더 힘껏 움켜쥐면서 "죽지 않을라마 빨리 가자" 하셔서 그대로 딸려갔다. 가끔 대포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불길이 치솟기도 했다. 마을의 장정들은 이미 전쟁터로 나가고 남아있던 노인들과 아이, 여성들은 이렇게 쫓기듯 급히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길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도천면 모리마을(현재 예리)에 있는 증조할머니의 여동생이 계시던 한 씨 댁이었다.

 

   8월 2일부터 3일까지 미 제24사단은 낙동강을 건너 영산, 창녕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 날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면서 헤엄쳐서 강 위로 올라오는 흑인 병사들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의 모습이 어린아이(신병화 씨의 형)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던지 '저기 물속에서 검은 고기가 나온다'라며 놀라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고 전한다.    


   가지고개에서 모리로 가는 길은 십자둘 쪽으로 가서 '치이골 고개'를 넘어 논리 앞을 지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도에서는 5 킬로미터가 안 되는 거리이지만 당시의 도로 상황을 고려하면 넓은 도천천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거친 고개를 넘어가는데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어린아이와 몸이 불편한 노인까지 대동한 것을 고려하면 한 나절도 훨씬 더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전황은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이 아군의 예상을 뒤엎고 영산의 바로 앞인 오항나루(옛 송진의 요강나루로 추정) 일대로 도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영산, 도천, 부곡 일대에 인민군이 들어온 시기(8월 5일부터 8월 18일까지로 영산지구 제1차 격전이 벌어진 시기)로 짐작이 된다. 지도에서 S자로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형의 특성을 이용해 북한군은 기습 도하하여 대구의 후방을 치고 밀양 부산으로 진격하고자 계획하였다.

 .  

가지고개 사람들의 피난경로 (1960년대 지도로 대체함)


  희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많은 사람들과 같이 신작로를 따라 걷고 걸었다.  여자들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어떤 사람은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멜빵으로 된 등짐을 지고 간다. 짐 위에 아이들을 얹어 가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난리터였다. 어린 희는 맨발로 할머니 손을 잡고 다녔고  발이 아팠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냥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제실이었다.

  

  모리에서 부곡까지 가는 길은 모리고개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사실을 말해 줄 사람을 찾을 길이 없다. 신작로는 부곡 - 수다 - 인교 앞을 지나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영산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동네 사람들도 그 길을 따라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고 한다. 장마사람 중에 소를 몰고 피난을 갔는데 중간에 소를 놓쳤으나 피난 갔다 오니 소가 집에 먼저 와 있더라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 길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가지고개에서 오방리 제실까지 지도상에서 최단경로로 잡은 거리는 16.3킬로미터 거리이다. 지금은 자동차로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지만 당시 여성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군경계를 넘어 40리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거리의 개념은 크게 의미가 없는 숫자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피난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오방리 제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냈으며 주로 밀을 배급받아 밀밥을 해 먹었다. 제실 앞으로 흐르는 물에서 자란 물풀을 뜯어서 반찬을 해먹기도 했다. 제실 주위로 소나무, 대나무와 감나무도 있었다. 희와 막내고모는 감나무에 오르내리며 놀다가 떨어진 감을 주워 먹기도 했다. 어린 희의 기억 속에 많은 장면이 남아있지는 않으나 보급부대로 가신 아버지가 가끔 다녀가신 것은 기억한다. 또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비가 올 듯한 흐린 날에 멀리서 가끔 들려왔다. 


 피난생활의 참상은 상상만 할 뿐이다. 당시 피난민이 수없이 밀려오니 마을마다 사람들이 못 들어오도록 똥물을 끼얹고 육탄전을 벌이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피난민을 받아준 은혜로운 도천면 모리마을과 밀양 초동면 오방리 두 마을을 표지 지도에 파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우리 마을을 가지리(加支里)로 기록한 유일한 지도(1956년 지도)이다.   


 얼마동안 피난살이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피난처에서 얼마를 지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니 마을 앞 들은 누렇게 벼가 익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마을은  집 두 채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서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때까지도 잿더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아군의 대반격의 초석이 된  영산지구의 제2차 전투 (1950. 8. 31 - 9. 5 ) 이후 9월 15일에 북한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진다. 그때 적군이 집들을 불태우고 갔다는 증언과 숨어있는 적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아군이 불을 질렀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사실을 알 길은 없으나  군대가 모두  빠져나간  9월 말 10월 초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적은 물러갔지만 고향의 산과 들에는 총알과 탄피가 널려있고 가축은 죽고 집과 산은 새까맣게 타서 재만 남았다. 많은 사상자가 나고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청년들이 입대하는 날에는 온 동네사람들이 마을 앞 도로에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며 염려와 눈물로 환송을 하였고, 아이들의 놀이도 전쟁놀이 일색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픔을 딛고 다시 모든 것을 일으켜세워 지금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사진은 1960년대 후반, 마을 재건 이후 면장님 댁의 풍경이다. 까만 고무신을 신은 아이, 소와 송아지, 집 뒤로 멀리 뒷산의 버드나무도 보인다. 본채와 아랫채 사이에 보이는 초가집이 전쟁 때 불타지 않고 남은 두 집 중에 하나이다.  그 집은 매년 지붕을 다시 이어가며 오랫동안  할머니 한분이 살았다. 집도 담도 흙으로 지어져서 들어가면 선풍기가 없어도 시원했고 마당 끝에 우물이 있어서 그 물을 여러 집들이 나눠 썼고 우물 옆에는 작고 까맣게 익는 기감나무가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하말남 님 사진 제공  


   이후 50년도 더 지난 2003년, 희는 다시 제실을 찾아갔다. 제실은 오봉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고 집도 새집이고 길도 포장이 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웠으나 장송 다섯 그루는 그 자리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 밭에서 일하던 오방마을 주민 한 사람에게서 그가 시집와서 시어머니께 들은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온 마을에 피난민들이 몰려와 같이 살았고 피난생활을 한 사람 중에 소달구지에 곡식을 싣고 와서 피난시절의 고마움을 답례하더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74년이 지난 피난이야기를 구성해 본 영희는 마음이 무겁다. 아직도 그 전쟁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휴전선에 우리 자식들이 총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영희의 아들도 올해 나이 20세가 되어 병무청의 부름을 받았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남자들이 언제쯤 국방의 의무에서 해방될 것인가? 



* 글 속의 '희'는 필자가 임의 설정한 당시 4살이었던 이배희 씨의 아호임을 밝혀둔다.


참고자료

- 국가기록원 (6.25 전쟁기록)

-  (B120)종이지도_1956_창원_SH0358115612_050k, 국토지리정보원

- 1960년대 국토지도,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서비스 배경지도

- 지역 N문화

https://ncms.nculture.org/korean-war/story/43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