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먹통이 된 날

by 운틴

나한테 제일 어려운 사람은 사돈이다. 귀한 자식을 키워 내 딸과 가약을 맺게 된 인연이 귀하고 서로 내 자식이 잘되기 위해선 상대의 자식 또한 잘 되길 비는 마음이 같기에 동병상련이면서도 대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나 결혼식 때 외에도 몇 번 만나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긴을 가졌다.

일 년만 못 뵈도 피차 나이들어가는 건 같아서 몸은 건강하신지 궁금하던 차에 겨울이 끝날 무렵 안부 문자를 드렸다. 안사돈께서는 “진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 같다”는 답변을 보내오셨다. 사돈은 아이들이 졸업한 학교 학부모들과 공동으로 땅을 사서 집을 지어 살고 계셨는데 집이 예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내 막내 동생은 사돈이 사시는 동네의 생협에서 운동을 지도하고 있는데 안사돈도 회원 중 한 분이셨다. 동생은 자주 어울리는 지역 공동체 사람들에게 들은 사돈댁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사돈이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문자에 대한 답으로 “마당이 예쁘다던데 꽃이 피면 한 번 불러달라”고 청했다.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큰 용기를 내었다. 안사돈은 “기대한 것만큼 예쁠지 모르겠다”며 날을 잡아 동생과 나를 같이 초대해주셨다. 동생도 말로만 들은 집에 가게 되자 신이 나는지 케잌을 주문해서 갖고 가겠다고 했다. 바쁜 분께 식사까지 준비하게 할 수는 없어 외식을 하자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해서 어려운 자리를 마련해 안사돈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보청기에서 이상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보통 때 그 신호음을 들으면 새 배터리를 꺼내 갈아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가방에서 배터리를 찾으려고 여니 쓸데없는 치실은 두 개나 나오는데 보청기 배터리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앞이 캄캄해졌다. 평소 두 세 개씩 챙겨갖고 다니던 걸 이날은 쏙 빼놓고 나온 것이다.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 일정을 완전히 망쳐버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는데 설마 조금은 버텨주겠지 생각한 배터리가 밥을 먹는 도중에 ‘꼬르르륵’하며 꺼져버렸다. 배터리가 나가버리는 동시에 내 귀는 먹통이 되어버렸다. 이 상황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더 난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어 나는 부랴부랴 이러저러 해서 이제부터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선언해버렸다. 마음은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생과 안사돈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눈에 불을 켜고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니 2-30% 정도는 이해할만한 내용이 있어 가끔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하고 맞장구도 쳤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사돈댁으로 옮겨 차를 마시기로 하고 일어섰다.


가는 길에 뭐라도 해보려고 편의점에 가서 보청기에 맞는 배터리가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보청기 전문점에서만 파는 거라 찾을 수가 없었다. 보청기 매장까지 다녀오기에는 일어서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촉박했다. 일이 그렇게 되니 모든 걸 하늘에 맡기는 심정으로 사돈댁에 갔다. 안사돈은 내 이런 사정을 잘 헤아리시고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말씀을 하셨고 나는 내 잔존 청력을 쥐어짜내어 잘 들으려고 최대한 애썼다. 그리하여 큰 실수 없이 다과와 함께 정담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감 중 하나의 감각이 사라진 후 남은 감각으로 버티니 몸은 급격히 피로해져 녹초가 되었다.


평생 이렇게 난처한 날은 처음이었다. 가끔 집에 보청기를 두고 출근한 날, 집에 보청기를 갖다줄 사람이 없을까봐 묘책을 강구한 날 만큼이나 황당했다. 집에 돌아와 쌓여있는 배터리 중 하나를 보청기에 새로 끼우며 앞으로는 외출할 때는 꼭 안경을 챙기면서 배터리도 같이 챙기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몇 년 만에 보청기 없이 대화를 하게 되니 보청기를 끼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더 어려운 극한의 상황을 겪고 나면 힘들다고 생각한 일쯤은 우스워진다. 이날은 그렇게 바닥을 치고 올라와 기념할만한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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