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명절이 되면 군포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친척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마루 위에서 병풍을 앞에 두고 절을 하는데 유일하게 우리 오빠만 마루 아래 댓돌 옆에 여자들과 같이 서있었다. 기독교인인 엄마가 제사를 지내는 건 우상숭배라며 오빠를 빼놓았는데 어렸던 내가 받은 인상은 기독교인 이어서라기보다 청각장애인이라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다른 남자들과 오빠가 다른 점은 청력이 좋지 않다는 거 하나로 설명될 수 있어서 청각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섞이기 어렵고 배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내 난청이 심해졌을 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날까 봐 철저히 숨기려고 애썼다.
제사에서 오빠가 따로 떨어져 서있던 모습이 시각적인 효과가 극대화된 풍경으로 기억되는데 나중에 다른 농인들을 만났을 때 모두 똑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명절에 친척을 만나는 걸 대부분 싫어했고 어쩔 수 없이 친척을 방문하거나 자기 집에 온 손님이 있을 때는 방에 혼자 들어가 있는 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고 했다. 수어를 모르면 필담을 나누거나 입모양을 보고 대화를 하는 식으로 대화를 시도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피차 번거로운 일이어서 자리를 피했다고 했다. 어떻게 모든 집에서 똑같이 그럴 수 있을까 신기했지만 알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에 있을 때 조금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오빠를 불러야 할 땐 물건이 날아다니는 일이 잦았다. 긴급하게 불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일어서서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쳐서 주의를 돌려야 하는데 그게 귀찮을 때면 가까이 있는 공책이나 종이를 동그랗게 뭉쳐서 오빠를 향해 던졌다. 처음엔 기분 나빠하다가 던진 물건에 대해 얘기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그냥 물건이 날아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건 연년생인 오빠와 나 사이에만 있던 일이었는지 막내 동생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오빠에게 이렇게 무례했던 내가 이제는 청각장애인에게 예의를 갖춰달라고 호소하는 글을 쓰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빠는 듣지 못해 전화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교적이어서 전화할 곳이 많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내게 자신의 전화를 대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숫기가 없던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이것저것 묻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전화를 어떻게 하고 받는지에 대한 기본예절도 익히기 전이라 그 일이 늘 고역이었다. 오빠가 물어봐 달라는 내용을 전달하고 대답을 들은 후에 전화를 끊고 나면 항상 더 물어볼 게 있다며 다시 전화해 달라는 재촉이 뒤따랐다. 그러면 내 나름의 추측을 오빠에게 강요하며 전화하는 일을 피하려고 했는데, 수긍이 되지 않은 오빠는 다시 전화하라며 나를 재촉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전화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서 오빠에게 여자친구나 아내가 생기기를 목놓아 기다렸다.
부모가 모두 농인인 가정의 자녀를 코다(CODA)라고 한다. 코다인 아이들은 걸을 수 있고 어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면 부모를 따라다니며 통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 수어가 모어인 코다 아이들은 부모의 수어를 알아듣고 가게 같은 데서 “이거 얼마예요?”라고 음성으로 묻고 가게 주인에게 들은 대답을 부모에게 전해준다. 간혹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 농인 부모는 아이에게 흥정을 해보라고 시키기도 한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 레슨비를 깎아달라는 엄마의 말을 학원 선생님에게 전달한 적이 있는 나는 코다인 어린아이가 어른을 상대로 흥정을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청각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는 집의 풍경은 그렇지 않은 집과 많이 다르다. 시간이 흘러 모두 과거의 추억이 되었는데 21세기인 지금은 사회적 분위기나 농인의 문화가 많이 달라져 보기 어려운 풍경일 수도 있겠다. 필요할 때 당연하게 수어통역사의 도움을 신청하여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가족이 변하고 있는 사회적 추세에 맞춰 가정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당연시 했던 일이 사회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걸 얼마나 잘 해내는가는 우리의 복지 수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