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는 농인이다. 아니 구화인이다. 어릴 때는 구화인이었다가 지금은 농인으로 산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나하고 한 살 차이가 나는 오빠는 어릴 때 열병을 앓고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 청력을 잃은 것에 비하면 운이 없는 편이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병원에 오빠를 데려갔다. 심지어 신앙의 기적으로 오빠를 고쳐보려고 신에게 매달렸다.
들리지 않는 걸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포기한 후에는 매일 오빠를 앉혀놓고 말을 가르쳤다. 오빠가 다니던 특수학교에서 어깨너머로 언어 훈련법을 배워 밤마다 오빠와 같이 복습했다. 목젖에 손을 올려놓고 발음에 따라 목이 어떻게 다르게 울리는지 느끼라며 발성 연습을 했고 발음이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십 번 반복했다. 오빠를 훈련시키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느라 나를 포함한 세 동생은 뒷전이었다. 장애가 있는 형제자매가 있는 집의 아이들은 자랄 때 충분한 돌봄을 못 받기 마련이다.
오빠가 다니던 특수학교에는 수어를 아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다. 오빠가 친구에게 배운 수어를 집에 와서 할라치면 엄마는 질색을 하며 절대로 수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오빠는 내가 다니던 일반학교로 전학 와서 비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받았다. 들리지 않으니 수업을 들을 수는 없어서 매일 학교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왔고 그 날치 공부는 집에 와서 엄마랑 둘이 하거나 과외를 받았다. 말하는 건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처럼 했고 듣지 못하면서도 꿋꿋하게 지겨운 학교 생활을 견디고 대학을 졸업했다.
엄마가 집에서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점점 커가면서 농인 친구들을 따로 만나 수어를 익힌 오빠는 친구들과 수어로 대화했고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비장애인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했다. 이제 엄마는 돌아가셨고 오빠에겐 농인 커뮤니티가 가장 중요한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오빠와 같이 자라는 동안 그 변화 과정을 지켜보았고 이제는 나도 수어를 배워 오빠와 수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 오빠가 어릴 때 수어를 배웠으면 어땠을까 상상할 때가 있다. 어릴 때 수어를 배우고 청각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으면 어린 시절이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엄마의 욕심은 7,80년대에 소위 ‘정상인’이라고 불렀던 그룹에 오빠를 끼워 넣고 싶어 했던 게 전부다. 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아들을 향한 엄마의 꿈은 이루었지만 학교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던 오빠의 어린 시절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문자통역이나 수어통역으로 수업 보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엄마는 본인이 모르는 수어를 아들이 하는 게 싫었고 엄마가 아는 언어로 아들이 소통하기를 바랐다. 엄마의 바람도 중요하고 오빠의 시간도 아깝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만일 내가 엄마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그냥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그때 그 자리에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