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를 지난 릴리아는 남편과 사별 후 딸과 살고 있는 평범한 튀니지 여성이다. 자신의 딸이 캬바레에서 반주를 하는 남자 초크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 릴리아는 초크리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일하는 캬바레에 찾아 갔다가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밸리 댄서의 옷을 만들어 주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캬바레를 찾는 날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경험한 캬바레는 무료하고 외로웠던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고 억눌려 있던 그녀의 성적 욕망마저 되돌려 놓게 된다.
파리에서 유학할 때 난 아랍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유학을 떠나기도 수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라크 영화 한 편을 보고 중동의 신비로움에 심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가는 꿈도 꾸었지만 결국 가게 된 곳은 유럽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라는 국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랍인들, 아랍 문화권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러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래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네딘 지단이나 카림 벤제마가 알제리계라는 사실만 알뿐 모로코나 튀니지 등의 북아프리카 국가들에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본 프랑스인들은 적어도 내 눈에는 북아프리카계로 보이는 남자들뿐이었다. 택시를 타러 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험악한 인상의 택시 기사들을 보았다. 곧 거리 곳곳에서 북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마주하고 스쳐 지나게 된다. 그들과의 좋은 추억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어느 날 'Satin Rouge'라는 영화를 조금 봤는데 난 영화의 첫 장면들에 이끌렸다. 라자 아마리라는 튀니지인이 감독한 영화였고 왜인지 이창동의 영화와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당시 난 '시'라는 영화를 좋아했는데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이를 먹은, 그리고 더 먹은 여자가 춤에 빠지고 시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아니면 그저 그리움 향수 같은 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한국이라는 나라와 비교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즈음 그런 습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습관이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는데 프랑스인들을 보면서는 선진적인 부분과 북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보면서는 잠재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춤과 시를 배우면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그건 문화의 힘에 관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저 읊고 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과정들을 거치는 것이다. 예술 영화에도 결국 어떠한 형식이 존재하듯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그런 것을 배웠는지 모른다. 개발의 과정이나 발전의 시스템 같은 것을 말이다.
유학의 목적은 쇼콜라티에가 되는 것이었다. 초콜렛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Patrick Roger를 동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목적이 조금씩 변질되었다. 맛있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는데 나는 결국 한국인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만 했다. 초콜릿은 못 만들 것 같았다. 초콜릿을 만드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거라 믿었다.
끝내 그들과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권위를 동경하고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야 할 처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무언가에 깊이 빠지고 싶었다.
Satin Rouge 같은 경우는 직접적으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고 시의 경우에는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인지도를 높인 작품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큰 활약으로 이제는 미국 아카데미로까지 범위를 넓혔지만 결국 중요한 건 관객들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좋은 영화이고 무엇이 훌륭한 작품인가. 답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질문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영화에 끌리는가. 그래도 춤보다는 시가 나은 것이 과연 내 본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