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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b Sep 18. 2022

악마이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스토킹에 이은 살해까지, 그런 잔인한 범죄가 일어나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도 보완의 지시뿐이다. 물론 대통령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위로한다. 그런 범죄 뒤에 얼마나 큰 처벌이 따를 것인지도 경고해야 한다. 

피해와 가해는 한 인간이 모두 입을 수 있고 입힐 수 있는 것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가. 살해는 인간이 입힐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일 것이다. 세상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찾고, 그러나 인간 감정 역시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닳는다. 서로에게 그토록 무관심하면서도 끝없이 관심을 얻고 싶어하고,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면서도 자신의 아픔은 뼈속 깊은 곳으로까지 전달되고 있다 믿는 건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존심 때문에, 또는 어떠한 책임감 때문에 상처 또는 피해의식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일은 그것을 더욱 위험한 지경으로까지 이르게 한다. 예술적 감각이 그러한 감정을 해소시킬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는 살인조차 예술에 비유되고는 한다.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해서라도 풀릴 수 있다면 말이다.

어떤 악마도 살인마에게도 그들에게도 취미생활은 있었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그건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치부된다.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다. 그 일로 성공하는 사람은 단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왜 성공해야 하는가. 모든 작품들에 만족하고, 모든 작품들이 보다 자유로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나는 아마 그것을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산에 가서 풀을 뜯고 돼지를 사냥할 수 있다면 난 차라리 그럴 것이다. 흙과 나무로 집을 짓고 짚으로 된 지붕을 만들고 싶다. 집에 나무를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이 허무해질 것을 안다.

나는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말이다. 처음 그 제목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용기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거 어떻게 감당하려고 제목을 저렇게 지었을까 생각했다. 소설이 원작인 그 영화는 그러나 남성이 저지르는 추악한 범죄의 실태에 대해서도 고발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여성이 남성에게 강간당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피해자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자들은 스스로가 그런 모습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눈썹을 밀고 얼굴 곳곳에 피어싱을 하고 그런 괴상망측한 꼴을 하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한 여자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며. 지금 시대는 그렇다. 영화 '살인이 추억'처럼 말이다. 또한 그냥 평범한 얼굴이 죄를 저지른다.

천사이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내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양 끝에 위치하는 것을 포기할 것을 나는 종용한다. 하지만 내 상상은 다르다. 정치가 공상적인 것이라면 나는 붉은 땅의 끝에 서서 그렇게 외칠 것이다. 나는 전쟁을 반대한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011


살인의 추억, 2003


분노의 불씨를 스스로 키우지 말라. 그 거대해진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 때 세상은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무섭고 무겁게 다가온다. 서로 싸우더라도 다시 함께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늘 꿈꾸는 그러한 세상이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전히 공상적인 인간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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