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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Oct 09. 2022

여행 2005


1층 슈퍼에서 컵라면 하나를 샀고, 주전자에서 끓은 물을 부은 뒤 2층 방으로 올라가자 곧 주인 할머니가 뒤따라왔다. 그녀 손에 들린 것은, 그 그릇에 담긴 것은 몇 조각의 무김치였다. 삼척의 어느 해수욕장 민박집이었다. 겨울의 문 닫힌 민박집들.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어느 나이 많은 부부는 급히 보일러를 틀고 방을 내어준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때 눈을 뜨고, 나는 그곳에서 할 일도 없이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파란 바다에서 큰 파도가 밀려오고, 그러나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멋진 그릴에 올려진 고기가 아닌 컵라면에 무김치가 어제저녁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나는 지금 낭만에 젖어 있지 않다. 그때의 아침을 떠올리며, 아직 술이 덜 깨 몽롱하지도 않다. 낯선 아침이라는 것을 알았다. 겪어본 적 없는 초라한 여행자의 신세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곧 그러한 날들이 찾아올 것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늦은 밤 이따금 들려오는 소음처럼, 어느새 그것이 익숙해져 버린 듯 눈을 감는 일을 나는 마치 떠올려본 적 없는 듯. 그때의 일들이 추억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10층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6층에서 멈추고, 때론 4층에서 멈춰 이웃들과 반가운 듯 인사한다. 그중 누군가는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질까 예의를 갖추는 건지 모른다. 우리는 그걸 이웃 간의 예절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문화가 그러나 왜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고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난 그때 카메라를 들고 있었으니까. 컴퓨터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그때의 경험담은 잘 전달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지금도 핸드폰으로 시계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내가 버스에서 들으려 가지고 갔던 앨범은 나얼의 'Back To The Soul Flight'였다. 나는 그게 명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한국 노래들을, 그 예쁜 노랫말들을 R&B의 감성으로 담아낸 그 앨범은 우리나라 음악 역사에 반드시 기억될 앨범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그런 핑계를 댈 뿐이다. 나는 비겁했지만 그래도 용기 있었다.


그때부터 여행은 내게 그저 도망일 뿐이었음에도 다시 이야기할 용기가 있음을. 나는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않았음을.


그런 곳에서는 살 수 없기에. 도시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곳에서 사람들을 부딪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난 그때 그곳이 맹방해수욕장이었다는 것을 지금 다시 알게 된다. 잊어버려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겨울의 동해가 추웠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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