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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b Jan 10. 2024

'Daejeon is U'

https://youtu.be/s7rN90t79GU?si=_nElNvtBOKYTRBde


'대전이쥬'


충청도 사람 백종원이 사랑한 맛집이었다. 그는 중국 요리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그곳은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대전으로 왔다. 그 길은 ITX -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눈과 귀는 보고 듣게 하지만 터널을 지날 때는 캄캄한 압력에 시달리도록 한다. 집 떠나 고생하는 이유가 뭐지? 여행을 하다 보면 이따금 드는 생각. 그때 그 꿈 많던 어린아이는 아직 그대로인지. 잘 모르겠다. 꿈을 꿔 희망을 품었던 것인지 그 부풀어 오른 마음이 내 머리를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었는지. 

어릴 때 본 한빛탑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꿈돌이를 아는 세대이기도 한 나는 대전을 떠올릴 때 1993년 엑스포를 추억하고는 한다.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두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성심당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갔다 바로 나왔는데, 파리에서 3년 지내며 난 빵은 냄새만 맡아도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 안다 자부한다. 그 냄새는 별로였지만 우리나라 스타일로 빵을 이렇게 잘 굽네 생각을 한다. 지금 그 빵 한 입을 베어물었다. 이 한 입 맛보고자 그렇게 줄까지 선단 말인가. 왜 나는 짜장면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는 것인가. 면을 입속으로 끌어 당길 때 생기는 이상 작용과 함께 미원이라는 물질이 가져다주는 이상 세계 경험으로 인해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늘 이 세계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탈 즈음 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일이..

어느 순간 난 대전의 버스 안 어딘가에 있었다. 하나로, 진달래, 그리고 무지개 등의 글자들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갤러리아 타임월드였다. 버스 안에서 본 둔산동의 아파트들은 오래됐지만 지금 시대에 되려 혁신적이라 할 만한 이름들을 하고 있었다. 숙소를 나와 향한 곳은 또 백화점이었다. 구포역 앞 어느 카페에서 서둘러 정한 숙소는 라마다 호텔이었는데 조식 포함이었다. 8만 원대에서 시작한 가격은 13만 원대에 이르고야 말았다. 누군가는 마지막 가격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점점 불어나는 것이 아닌, 나는 때로 희망을 말하기보다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성수기 아닌 평일에 꽤 좋은 호텔에서 아침까지 먹으려면 14만 원부터 생각하세요. 돈은 아깝지 않았다. 그토록 이야기 들어온 조식을 먹었으니, 또 따뜻하게 머물렀으니.



대전으로 갈까 생각했다. 대구, 광주 모두 짧게라도 여행해 보았으니 대전은 어떤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득 그 방송이 생각났던 것이다. 태화장으로 왔다. 길게 줄을 설 것을 대비해 문을 열기 전에 갔고 열 두 번째 순서로 배정받았다. 앉아 기다렸더니 계속해서 손님들이 밀고 들어오는 놀라온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사람 많은 식당은 피하는 편이기도 했고 또 그런 집은 오랜만에 왔기에 난 그 광경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출입구는 하나이지만 출발지는 모두 달라서일까. 대전시의 역사는 철도 역사와 함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은 대한민국 중국 요리의 종착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부산에서도 그 정도 하는 중국집은 몇 군데 알지만 분위기, 맛 등을 모두 고려했을 때 태화장은 가장 사랑 받을 만한 중국집이었다. 역무원, 아 아니 종업원들도 모두 친절하고, 그런데 카운터에 앉아 전시 상황을 살피던 사장님으로 추정되던 여자분의 표정이 내겐 심각하도록 다가왔다. 오늘은 얼마를 벌까 보다 언제 계산 다할까 싶던 그 표정이 내겐..

숙소도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동래 온천 근처에서 살아온 내게 유성 온천 동네가 무언가 친숙한 탓도 있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은 부산은 길이 좁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길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유성의 큰 도로들이 무언가 개방감을 주기도 했다. 태화장을 갔다 와 내가 만든, 내 테이블로 오는 탕수육보다 남의 테이블로 가는 멘보샤가 더 커 보인다는 그 말처럼. 하지만 탕수육을 시키기를 잘했다는 그 생각처럼 나는..



갤러리아 타임월드를 벗어나 찾은 곳은 이제 그 아성을 넘었다는 신세계백화점이었다. 그곳 앞에서 우연히 그 탑을 보게 되었다. 저 멀리 한빛탑이 보인다. 꿈돌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추억에 사로잡혔다. 여행이 그토록 힘들다는 것을 그땐 체감하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나는 알게 된다. 나는 내 부모에게 내가 파리에서 그렇게 고생했다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두려움에 적응하는 듯이,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괴로워하며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 모습이 그 시절 내가 그린 어른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따뜻하지 않음을 나는 말해주고 싶다. 꿈돌이도 옷 한 벌 걸치지 않았음을. 겨우 그 고리 하나로 버텨냈다는 것을 말하며 나는 그들에 자연과학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싶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89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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