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ears hear what others cannot hear
small, faraway things people cannot normally see are visible to me
These senses are the fruits of a lifetime of longing
Longing to be rescued to be completed
Just as the skirt needs the wind to billow
I'm not formed by things that are of my self alone
I wear my father's belt tied around my mother's blouse
And shoes which are from my uncle
This is me
Just as a flower does not choose its color
we are not responsible for what we have come to be
only once you realize this do you become free and to become adult is to become free
Stoker, 2013
이 영화를 본 건 프랑스에서였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본 후 난 블로뉴 숲으로 갔다. 사진 찍고 싶은 장면이 하나 떠올랐고 배경이 될 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자 한 명이 필요했다. 난 그런 사진을 찍고 싶었다. 풀 숲에 있는 여자, 또는 소녀.
사슴 같기도 한 모습. 그 두 눈이 카메라를 보는 순간.
카메라는 눈이 하나 뿐이라서 그것과 부딪힐 때의 시선이 내겐 늘 흥미롭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말이다. 물고기조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는 보통 한쪽 눈으로만 사람을 보기에 눈동자의 움직임이 조금은 우스꽝스럽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섭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다 우연히 찍힌 행인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날카로움 같은 것. 사진 찍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그 눈빛.
한 번쯤은 눈동자를 클로즈업한 사진도 찍어보고 싶다. 스토커에서의 오프닝은 인디아의 독백이 시적이었고 그 장면들은 모두 한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동자를 클로즈업하는 부분에서는 현미경을 통해 무언가를 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 시퀀스를 보고 난 후,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러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빠의 벨트를 메고 엄마의 블라우스를 입고, 삼촌이 선물해준 신발을 신고. 그렇게 홀로 서게 된 인디아를 보면서 그녀의 본성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논리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삶은 건축적인 것이었다.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장소는 집이다. 인디아가 그 집을 떠남으로써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소녀의 미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녀는 어떤 집을 짓게 될까. 어떤 식으로 정원을 꾸미고 그곳에 자리잡게 될까. 또는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할 필요 없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생각할 뿐이다. 그녀는 충분히 잔혹하고 무서울 정도로 본능적이었으니까. 치밀한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눈과 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