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도시

by 문윤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도시에서의 삶을 숲에 비유해 사람들을 감동시킨 소설로 알고 있다. 삶과 숲이 지닌 유사성이란 단어에 들어가는 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ㅅ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ㅏ와ㅜ 그리고 ㄻ과 ㅍ이라는 서로 다르지만 닮은 것 같기도 한 뉘앙스들이 전해진다. 높은 빌딩들은 삼나무나 자작나무 같은 곧게 뻗은 나무들 같기도 하다. 나는 소나무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휘어 있는 빌딩들을 보고 싶다. 그런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고 싶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면.

어릴 때 산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은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친구들과 난 공포에 휩싸였다. 그 공포를 소리 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몸에는 이미 깊은 어둠이 엄습해 있었다. 대구에서 도롱뇽을 잡으러 갔다 실종된 아이들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몇십 년이 지나 도롱뇽을 잡으러 간 아이들이 끝내 유골로 발견되었을 때 경찰은 자연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저체온증이라는 가설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학수사는 타살의 증거들을 발견해낸다. 시대가 변하던 때였다. 감으로 쫓던 시대에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접근하는 시대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요즘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이론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말하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그 논리마저 분석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점 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그때 산에서 어떻게 내려왔을까. 몇 시간을 헤매고 드디어 처음 들어섰던 길을 마주하고서야 얼굴의 모든 근육이 풀려버리는 듯했다. 경직돼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던 표정들이 모두 밝아져 환해져있는 것을 느꼈다.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와 사람들이 사는 흔적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의 마음들이 다시 무력해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런 말을 하고는 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 그곳은 인간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말이다. 적응해 살아갈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음에도 말이다.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을 알아야 한다. 아니,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연을 알았기에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상실의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감각을 잃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감각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그가 북유럽 감성의 트렌드를 예감했던 것은 아닌지.

나중에는 일본에서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도 개봉했고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도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떠나왔고 떠나고 있다. 앞으로도 떠날 것이다. 그곳에서도 만약 길을 찾지 못한다면. 숲이 아름다운 곳이라 말하며 우린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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