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해본 적 없는 사람들. 의사, 변호사.. 그런 직업을 가진 자는 내 주위에 없다. 흔히 이 사회에서 엘리트로 분류되는 직업을 가진 자들. 적어도 친한 사람은 없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주인공은 산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그리고 작가였다.
'Born in the mountains, lives in the city'라는 몽클레르의 그 한 문장을 찾게 되는 영화였다. 부부는 큰 도시에 살다 그르노블로 옮겨 와 살며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기능적으로는 산에 어울리도록 만들어졌겠지만 그 옷은 도시 사람들에 의해 입히는 것이었다. '산에서 태어나 도시에 살다'. 교수이면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남편에게 그르노블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지.
작가인 아내는 그곳에 사는 게 큰 의미 없는 듯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앞에 앉은 다른 여자와 대화하던 장면에서 말이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전혀 알 수 없었다.
예고도 없이 50cent의 'P.I.M.P'가 흐르고 그 음악이 그르노블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기에 지울 수밖에 없었다. 내 귀는 눈보다 예민하지 않지만 때로 더 날카롭다는 생각을 할 때 있어 지울 수 밖에 없던 것이라 말할 것이다. 내가 날 변호해야 한다면.
그르노블 법정에 선 검사가 그런 말을 할 때 저들은 얼마나 똑똑하길래 하는 생각을 했다. 검사라면 전혀 듣지 않을 듯한 노래 가사의 의미마저 거론하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그 때도 흔들릴 이유 없었다. 난 그런 음악 따위를 들으며 정치 경제 이야기도 하고 사회 문화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깊이 스며든 건 인간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하는 행위에 대한 무서움 또는 공포심이었다. 끝이 뾰족한 언어들이 상대 목을 향해 들이밀어지고 논리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그들 면모를 느끼게 되는데.
배움의 무서움이란 그런 것일까. 싸워 이겨 상대가 더 발악하지 못하도록 밟아 누르기까지 하는 힘을 가지게 된 자들.
감독은 처음 Dolly Parton의 'Jolene'이라는 노래를 쓰려 했지만 잘 안됐다 한다. 내 H&M 티셔츠에 그 얼굴이 프린팅된 가수 돌리 파튼. 그런 노래라면 검사가 들을 만한 음악인 것일까.
변호사와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건 증인으로 잠깐 등장한 의사인 듯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이젠 그들도 정치에 나서려 한다는 내 의구심이 다시 한번 불러일으켜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게 사건이든 한 인간의 몸이든 추락은 해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Anatomie d'une chute. 영어에 익숙한 지금 사람들에게 약간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영어가 프랑스어와 아주 많은 단어들을 공유한다는 점 때문에 대충 이해할 수도 있는 말.
언론 기사만 읽어도 여기저기 덫이 깔려 있다 의심하던 내가 확신한 게 있다면 바로 언어야말로 칼이고 무기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말하는 능력보다 글 쓰는 능력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라는 자는 검사 변호사 판사들에 둘러싸여 공격받는 입장이 되고 만다. 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언어가 아닌 날카롭고 뾰족한 무기를 든 자들이 위협하고 덤비는 상황에서 점점 진실이 밝혀지고 산드라의 민낯이 공개된다.
모두 각자의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정말 생생하고 말이 되는 아주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읽게 됐다. 꼭 볼 수 있을 듯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온 것은 없었다. 모두 녹음된 소리로 글로 옮겨진 감정 따위로, 상식보다 더 크고 단단한 박학다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황으로만 이야기되는 사건이었다.
한 명의 증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사건은 아직 결론으로 이르지 못하는 상태였다. 역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증인이 그 입을 열기 전까지는.
난 여전히 목소리의 힘을 믿는다. 또한 걸음 또는 행위로도 모든 의사 목적 의식이 표현된다 믿고 그보다 더 확실한 건 없다 생각하며 영화를 보고 듣고 느끼는 데 집중하려 든다. 그 많은 복잡한 언어들이 그걸 방해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만큼 깊이 몰입하게 됐다. 그게 더 좋은 건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영화는 점점 한 인간의 머릿속 구조를 그 세계에서 펼쳐지는 장면 영상들을 감상하는 일이 돼가고 있다. 그 머리를 보며 한 번씩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했던. 깊이 빠져든 것처럼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이. 메트로 열차 안에서 본 적 있던 노란 머리카락의 그 좁고 긴 머릿속을.
https://www.imdb.com/name/nm2630323/
어디선가 다 본 적 있는 듯했던 사람들이 그런 영화를 만드는 걸 봤을 때 이젠 그들과 같은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낯설지 않고 신비롭지도 않았다. 그 도시 그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켜있는지를 본 적 있다. 그들 중 분명 그런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있었다면 다시 신비해지는 느낌이지만.
영화를 본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물체 생명체가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개였음에도. 보더 콜리로 보였던. 아직 감각적으로 더 예민하고 날카로운 듯했던. 그들 눈에는 인간 삶이 한 편의 긴 영화처럼 보일까. 가끔 훔치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시선이다. 아주 가끔은.
난 개를 키울 수 없고 잘 기를 자신도 없지만. 그 개는 그냥 개가 아니었다. 그 대사가 기억에 남는 건 결국 그 장면 그 소리들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듯했던 말들, 그 억양 그 음성들.
추락의 해부, 2024/ 쥐스틴 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