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쓸 때 난 영화를 떠올리는 편이다. 창작을 할 때, 장면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이어붙일 때 영상을 찍고 그것들을 편집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어릴 적부터 신문은 많이 읽었고 지금도 인터넷 기사를 자주 읽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문장이 좀 딱딱한 경우가 많다. 그랬다, 저랬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문장을 쓴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드물게 읽은 몇몇 소설, 수필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표현 방법을 익히기도 했다. 익히고자, 그렇게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은 그렇게 움직였다.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였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독백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대사가 적은 대신에 주인공 오대수 스스로가 말하는 장면이 많았다. 있어왔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대해서 이야기한다. 스스로에 묻기도 한다. 반문하기도 한다.
'10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가장 재밌었던 대사다.
'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그 문장이 내겐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 방식에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충격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나와 길거리 불량배들을 만나 싸우는 그 장면은 우리 집 근처 부산대 지하철역 아래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우진의 가슴에 난 흉터는 내 가슴에 나 있는 흉터의 모습과 꽤 비슷했다. 난 심장병 어린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우연들을 필연처럼 받아들였다. 예술가처럼 살고 싶었고 그것에 몰입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롤모델을 정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올드보이와 같은 반전 결말 이야기를 꼭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냥 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하고 시작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3년이든 4년이든, 혹은 15년이 됐든 누굴 원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이 대사도 명대사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소설이 영화와 다른 점은 결국 영상이 아닌 글로 이야기한다는 것일 테다.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는 사소한 소품들조차 중요한 도구로 인식된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 설계되고 디자인된다.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격자무늬의 벽지가 칠해진 방. 이런 식으로 쓰면 될까. 회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합천댐. 이렇게 설명하는 끝나는 것일까.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글자 하나 하나가 소품이며 건축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풍경이다. '문장'이라는 건축물이 있고 '풍경'이라는 건축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구조물은 바로 '이'와 '이다'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감정 하나를 이루고 중요한 반전을 이끌어내기도 할 때. 쾌감이라기는 그렇고 그런 것을 할 때 살아 숨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나만의 영화를 찍는 듯한 기분이었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감정을 표현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법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다. 가장 걷고 싶은 길은 일반적인 방식을 피해 가는 길이다. 글을 쓰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길은 걷기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따라올 것인가.
난 박찬욱 감독을 따라 하려 했지만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소설이라는 차이점도 있지만 말이다. 결국 서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내 소설에서는 광장이 중요한 장소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들은 그곳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이야기들을 가지고 그곳에 모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