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말을 한다. 한국말을 한다. 한국 사람이 되었다. 국적은 그렇게 언어로 결정되는 것일까.
어느 날 송상현 광장 앞을 지나다 외국인 두 명을 봤다. 금발 머리에, 그런데 그 걸음걸이나 행동거지가 도저히 외국인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비속어까지 섞어가며 대화하는데 난 혼란스러웠다. 길에서 웃으며 자지러지는 흔한 여고딩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국적은 언어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들은 많다. 하지만 발음이나, 또는 말할 때 짓는 표정이나 행동 같은 것을 완벽하게 따라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복제 능력을 지녔어도 말이다. 아파트의 창문 모양은 모두 똑같다. 누군가가 허허벌판에 기와집 한 채를 짓는다면 그곳은 몇 년 후에 마을이 될지 모른다. 국적은 소속감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여기며 살며 거울 속 외국인을 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TV를 보는 것도 유튜브를 보는 것도 모두 꼭 거울을 보는 행위 같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죽고 사는 일에 눈물 흘리고 또는 기뻐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움직인다. 사랑하고 싶거나, 아니면 사랑이 더 이상 하기 싫거나. TV 속 그 여자는 그 남자는 나를 알지조차 못하는데 말이다. TV 속 그 여자가 그 남자가 누군가와 사귀거나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실망하는 것일까.
정말 좋아하던 유튜버가 조금씩 질리기 시작할 때는 그가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낼 때다. 또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할 때다. 스스로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내가 끌린 사람이 원래 저런 모습이었나.
우리나라 사람이 말을 한다. 외국어를 한다. 외국인이 되었다. 그런 그를 나는 배신자라 불러야 하는 걸까.
나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면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다른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길 수 없다. 이 세계가 더 발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처음 외국인의 존재를 접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난 동네 형들 친구들과 그 아이를 쫓아가 놀려댔다. 그 아이는 호주 아이였다. 그 호주 아이는 자신의 집 앞에 다다르자 돌아서 우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우리는 도망갔다.
하지만 아직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예쁘기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길에서 유독 피부가 까맣고 머리가 곱슬한 아이 하나가 지나가는 나를 보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난 그저 인사성이 밝은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는 사이다. 친구가 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서로를 인지할 수 있다.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