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끝맺음에서 시작되는 전환
다음 주, 서울로 돌아간다.
이번 귀국은 화려한 복귀가 아니라, 온전한 작별이다.
이사는 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이제는 안다. 이 끝맺음이 새 시작의 에너지라는 것을.
끝의 결을 예쁘게 다듬을수록, 시작은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지난 회차 예고대로, ‘세브란스 북클럽’이 내게 남겨준 철학 수업을 이어 간다.
의대 교수이자 연구자가 본업인 나는, 사실 아무 기대 없이 브런치를 시작했다.
해외에서의 생존, 일상의 소소함, 무엇보다 한국어로만 표현하고 싶었던 진심을 기록하는 자리.
전업 작가도 아닌 내 글을 꾸준히 읽어 주는 뛰어난 브런치 작가님들이 있어,
오늘도 모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한국어 문장을 쌓는다.
북클럽에서 시작된 독서 습관 덕분에, 나는 지금도 매일 한국어 종이책으로 뇌를 식힌다.
현지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은 가끔 e북으로, 신간은 원서를 바로 읽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원어의 뉘앙스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의도가 더욱 선명해진다는 점이다.
주말에도 변함없다. 새벽 4시 반, 고요한 서재에서 논문과 신규 과제 계획서에 몰입한다.
하루에 세 언어를 넘나들며 쓰고 읽는다.
영문 논문 작성·레퍼런스 정리, 중국어 연구계획서·성과보고서,
그리고 마음을 붙잡아 주는 한국어 독서.
이 셋의 왕복은 내 뇌를 지치게 하기보다, 오히려 사고의 폭을 넓히고 아이디어의 결을 미세하게 다듬는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언어철학자 소쉬르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어휘력을 길러라.”
우리는 언어의 틀(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파악한다.
그러니 더 정밀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더 섬세한 단어를 장착하고, 더 다층적인 표현을 익혀야 한다.
과학 연구에서의 오차를 줄이듯,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그게 곧 사고의 확장이다.
현지에서 연구비를 받으려면 심사위원의 기준과 문장 결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나는 수많은 중국어 자료를 씹어 읽었다.
숨은 규칙을 찾고, 원고를 수십 번 갈아엎었다.
한국어·영어 프레임을 잠시 내려놓고 현지의 논리로 바라보자, 문장에 손잡이가 생겼다.
그때부터 돈이 되는 문서, 설득이 되는 문서가 쓰였다.
나선형 성장곡선을 타고, 익숙한 틀을 깨고, 몰입의 흐름을 믿어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진짜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낌으로 안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의 모델은 변화의 단계를 이렇게 말한다.
"해동–혼란–재동결."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된다.
중국 생활 3년 차.
생활양식·식습관·문화는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직장문화와 사고방식은 달랐다.
한국에선 모든 공적 업무를 이메일로 마무리했지만, 이곳은 위쳇 메신저가 공문 역할을 한다.
처음엔 촌스럽다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법.
내가 고수하던 방식이야말로 새 출발을 막는 프레임이었음을 인정했다.
기존의 방식을 ‘끝내자’ 현지의 일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한국인들의 근로 형태를 보면 주재원·방문학자·파견이 많다.
나는 조금 다르다. 정년이 보장되는 전임교수로, 해외 인재 처우와 대학 제공 아파트까지 갖췄다.
젊은 나이에 안정적인 ‘자리’를 얻었지만,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적응’보다는 ‘견딤’에 더 가까웠다.
언젠가는 한국으로—이 생각이 오래 나를 붙잡아두었다.
이제야 안다. 끝내야 할 과거가 남아 있었던 것뿐이라고.
다음 주, 서울로 돌아간다.
금의환향을 위한 귀국이 아니다.
전세 계약 만기를 마무리하고, 서울 집의 대형 가구는 기증 또는 폐기,
가전은 배편으로 중국으로 보내는 정리의 귀국이다.
당분간 서울의 ‘나의 집’은 문을 닫는다.
(언젠가 스승님의 제안으로 한국 전임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다시 문을 열면 된다.)
국제 이사가 끝나면, 나는 온전한 재외국민이 된다.
부모님 댁에서 머무는 대신, 한국에 들를 때는 호텔을 ‘내 방’으로 삼을 것이다.
1~2주의 소중한 휴식에 ‘손님 대접’의 부담을 섞고 싶지 않아서다.
박완서 선생의 문장이 여기서 힘이 된다.
“너무 잘해 주는 친척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이 오히려 편할 때가 있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내 방이 어디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향수와 평화를 얻는다.”
이사는 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살아온 지금까지 한국에서만 열 번, 중국에서도 벌써 세 번의 이사를 했다.
그래도 이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번엔 안다.
이 끝맺음이 새 시작의 에너지라는 것을.
스무 살의 내가 서른셋에—그것도 중국에서—전임이 될 줄을 몰랐던 것처럼,
내일의 나는 다시 한국에서 강단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별은 도착이 아니라 방향일 때 더 오래 빛난다.
이번 귀국은 화려한 복귀가 아니라, 온전한 작별이다.
그래야 다음 장이 열린다.
끝의 결을 예쁘게 다듬을수록, 시작은 더 단단해진다.
위그 드 생 빅토르의 문장을 오늘의 북마크로 남긴다.
“자신의 고향을 감미롭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초심자다.
모든 땅을 고향처럼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온 세상을 타향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사람이다.”
이번 귀국은, 내 마음의 지도를 넓히는 의식이다.
끝까지 끝내고, 그다음 가볍고 단단하게 다시 걷겠다.
그 길 끝에서 언젠가—고국의 부름이 올지라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만든 별을 스스로 달고 있을 것이다.
빛은 방향일 때 오래 간다.
다음 회차는 브런치북 <나는 여전히 한국을 빛내고 싶다>의 마지막, 30화.
계획대로라면 그 끝맺음은 서울 집의 마지막 밤에서 조용히 찍을 마침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침표는, 다시 시작을 예고하는 첫 숨으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