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북클럽이 남겨준 『자기 결정』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by 박주영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누가 대신 결정해 주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조율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페터 비에리의『자기 결정』

서울에 다녀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5년을 품고 살았던 서울 전셋집을 정리하고 떠나기 전, 나는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여러 권의 책을 주문해 마지막으로 배송을 받았다. 그리고 그 책들을 캐리어에 꾹꾹 눌러 담아 다시 중국, 내 직장이자 내가 살고 있는 교수 아파트로 돌아왔다.


중국 현지에서 나는 중국어로 동료와 학생, 제약사 영업사원들과 소통해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어로 책을 읽고, 한국어로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내게 ‘취미’가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는 필수가 된다. 모국어로 생각을 빚어내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나는 더 의식적으로 한국어 문장을 찾는다. 그 언어 안에서만 내가 나답게 숨을 쉬기 때문이다.

가끔 누군가는 묻는다.


“해외에서 모국어도 마음껏 못 쓰고 외국어로 직장 생활하는 삶, 외롭지 않으냐”라고.

그런데 나는 되묻고 싶다.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정말 덜 외로운가. 가족과 함께 살아도, 매일 같은 도시에 살아도, 직장 안에서의 갈등과 스트레스, 번아웃과 고립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외로움은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문제에 더 가깝다.


서울을 떠나 해외로 진출한 ‘자기 결정’

작년 추석 연휴 때, 한국에 잠깐 귀국했을 때다. 박사 공부를 함께 했던 친한 언니를 만났다.
나는 서울 거리를 보며 감탄했다.

“직장생활이 아닌 휴가로 돌아와 보니까…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네요.”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하다 보면, 서울 거리는 아름다울 수가 없어.”

웃고 넘긴 대화였지만, 나는 언니의 말이 오래 남았다.


어느 나라든 직장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많다. 그런데 서울은 유독 ‘숨’이 빨라지는 도시다. 서울에서 일하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옮긴 사람들, 그리고 중국으로 옮긴 나까지—우리는 각자 다른 자리에서 그 속도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28세에 박사 졸업을 했고, 모교에서 포닥으로 후속 연구를 이어가며 논문 실적을 쌓았다.

그리고 34세에 전임교수 임용에 성공해 지금은 부교수로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다.


같은 시기 박사를 졸업한 언니는 대기업 제약회사로 들어가 이제 부장으로 승진했다.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을 위해 정릉 쪽에 작은 아파트를 샀고, 30년 할부로. (30개월이 아니라 30년이다.) 언니는 월급날 할부금이 빠지면 남는 돈이 얼마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곤 했다.

모국어로 일하고, 서울에서 대기업 부장으로 승진했고, 내 집을 가진 언니가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30년 할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대신 숨이 막히기도 했다.


나도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 삶을 살았겠지. 그래서인지 나는 20대 후반에 대기업 제약사 취업이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학계에서 연구 성과로 서바이벌하기로 결정했던 선택이 결국 지금의 나를 데려왔다.

여기서 나는 자주 결론을 내린다.
그 누구의 삶도 ‘더 좋은 삶’ ‘더 성공한 삶’으로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하고, 내게 최적화된 삶을 잘 살아내는 것. 그게 내가 믿는 최고의 인생이다.


‘자기 결정’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내 삶의 저자권을 되찾는 일

『자기 결정』을 읽으며 나는 한 가지를 더 선명하게 배웠다.

자기 결정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건 삶의 주체이자 작가로서, 내 자아상을 스스로 그려보는 일이다.

우리는 수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가족, 학교, 사회, 성과, 시선, 기대.
그러다 어느 순간,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질문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내 마음이 나와 조화로울 수 있는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 선택과 행동이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조금씩 맞아떨어질 때—

그때의 삶이 가장 ‘존엄하고 편안하다’.
나는 그 상태를 자기 결정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20대 후반의 자기 결정, 30대 초중반의 ‘집’ 결정

서울에서 떠나 중국으로 들어오니, 따뜻하고 해가 잘 드는 내 집이 기다리고 반겨준다.
이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나는 집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학창 시절에도, 교수로 근무 중인 지금도, 평일 업무 외 시간과 주말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외부 약속, 외식, 쇼핑에 큰 흥미가 없다.
내향인이자 연구자 성향인 나는 집에서 혼자 운동하고, 랩톱으로 연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만의 행복을 만끽한다.


현재 중국에서 거주 중인 교수 아파트는 해외 인재로 임용된 교수에게 대학이 처우로 제공한 집이다.
넓은 거실과 통창, 넓은 안방, 집중이 잘 되는 서재, 아일랜드까지 포함된 주방. 모두 남향 구조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통풍이 잘 된다.

독립 이후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살아온 나는, 3년 전 중국 전임교수 임용과 함께 비로소 그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이뤘다.


나는 평생 대출 없이, 남에게 빚지지 않고 살아가는 신조가 있었다.
그 신조는 서울에서 ‘대출 없이 내 집 마련’ 앞에서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중국이라는 다른 무대를 택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것도 하나의 자기 결정이었다.


북향 전셋집에서 확신한 것: 나는 왜 떠났는가

이번에 서울 전셋집을 정리하면서, 집구석구석에 남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확신했다. 내가 왜 번듯한 세브란스에서 사직하고, 해외 이직을 선택했는지.


내가 살던 마포구 공덕동 투룸 전세는 북향의 구옥이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트인 통창이 아니라 구식 창문이라, 살면서도 답답함이 종종 올라왔다. 북향이라 그런지, 이번 귀국에서 집을 정리하는 5일 동안 가스보일러를 틀어놓았는데도 남향집에 익숙해진 몸에는 으슬으슬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떠나기 전 내 마음은 시원섭섭함 그 자체였다.


전에 읽었던 한강 작가님의 『빛과 실』에서 『북향 정원』 이야기가 특히 남았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정원에서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작가는 거울의 각도를 하나하나 조절한다.
그 부지런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배웠다.
행복은 원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고 조율해 내는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노벨상 수상 후, 한강 작가님은 여전히 북향 정원을 가꾸고 계실까?
아니면 남향의 넓은 정원이 있는 집으로 옮기셨을까?
지금도 작품을 쓰고, 산책하고, 정원을 돌보며 신체 활동을 유지하고 계실까?


결국 중요한 건 북향이냐 남향이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환경이든 그 안에서 나만의 각도를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북향을 견디며 각도를 맞추는 사람도 존경하지만,
내게는 지금 남향의 빛이 더 잘 맞는 사람이라는 걸.


문학은 왜 내 삶에 필요한가

내 직업은 의대 교수다. 내 업무는 의학 지식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전문 지식을 배우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치료 패러다임을 여는 역할.
그렇다 보니 문학은 내 본업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
20대엔 비문학을 선호했지만, 30대 이후엔 문학의 묘미를 즐기게 되었고, 글쓰기도 조금씩 꾸준히 하게 되었다. 본업과 직접 관련 없어 보이는 취미가 오히려 나를 더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왜일까.

문학은 내게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열어준다.
사람이 삶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내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공감 능력이 자라고, 정체성이 성장하거나 실패하는 과정의 미세한 결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더 자주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독서는 삶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진짜 변화는—내가 읽은 것을 내 언어로 재구성해 “내 문장”으로 만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글을 쓰며 나는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어떤 울림을 내는지 확인한다.
그 과정은 멀리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구경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덜어내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연습하는 변화의 사건이다.

그래서 나는 평일 새벽에 독서로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 후 저녁을 독서로 마무리하며,
주말의 한 조각 시간에는 나의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
그렇게 나는 부단히 내 삶을 ‘조정’한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누가 대신 결정해 주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조율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하루에도, 작은 결정 하나가 있었겠지요.
사실 삶은 거대한 선택보다, 사소한 선택의 반복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내가 선택한 것’으로 살고 있나요?
반대로, 내 것이 아닌데 습관처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 당신의 삶에서 빛이 드는 방향은 어디인가요—

그 빛을 더 들이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정리해야 할까요?


누구의 기대가 아니라, 당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결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오늘, 딱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내일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선택은 무엇일까요?


나는 오늘도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결국 내가 결정하는 삶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