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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by 한설홍

왼쪽 팔꿈치에 작은 종기가 났다. 짠다고 뒀다가 뭘 잘못했는지 벌겋게 부어 농이 점점 들어찼다. 부딪칠 때 마다 살을 에는 아픔이 일어났다. 조금만 지나면 나아지겠지, 괜찮겠지 하며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톡하고 짜면 고름이 나올 것 같은데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건드릴 수도 없었다. 항생제 며칠 먹으면 나아질 일이기도 했겠지만, 몇 주 전 입술에 잔뜩 올라온 수포로 얼전트 케어 방문 후 약을 지었더니 50불이 넘게 나왔다. 예전 같음 그냥 갔겠지만, 요즘 쉬프트 캔슬도 자주 되는 데다가, 겨울이라 이래 저래 모임도 많아서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중이라 다시 병원가고 약을 지어먹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오백원 동전만한 작은 부풀음이었다. 매일매일 커져가는 환부를 보면서 병원에 cellulitis로 입원하는 환자들의 환부와 크게 다를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뒀다.


삼개월정도 이야기하던 친구와 더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올 해만 몇 번 째인지, 아니 여기 와서 몇 번 째인지 모르는 인연이 멀어졌다. 매일을 연락하던 사람과 한순간에 연락을 안한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다. 좋아하는 감정인지 단순히 익숙해 져서 아쉬운 감정인지 구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혼자서 장거리 여행도 다녀왔다. 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서 울고 싶음 울고 노래 부르고 싶음 노래를 불렀다. 미국에선, 내가 어떻게 해도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행동을 하는게 너무나도 마음이 편해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단어를 알려줬었다. 사람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절처럼 때를 타고 왔다가 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대견함마저 느껴졌다. 언어도, 생활도 그리고 나에 대한 자아상도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구나. 내가 이 곳에 익숙해 질 수록 이 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구나. 환경이란 건 참 무서운거다.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마음이 참 편하다. 가슴은 아프지만,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유독 힘들었던 쉬프트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계속 캔슬되는 와중에 불러만 줘도 고마운 심정이다. 그리고 팔꿈치를 봤는데 톡 하고 상처가 틑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르르 농양이 흘러나왔다. 감염내과 의사 선생님이 병동에서 하던 것 처럼 상처 부위를 열심히 쥐어 짰다. 시간이 지나 부은 부위가 많이 줄어들어 통증도 많이 줄어들었다. 거짓말처럼 상처부위가 작아졌다. 고름과 피가 계속 나오다 그쳤다. 속이 다 후련했다. 환부는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니까,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애써 뭘 하려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잡으려 하지 않아도 그렇게 시간에 기대어 일어난다. 몇 주전 있었던 상처의 고름이 이제야 터지듯, 삼개월을 아리송하게 이야기 하던 친구와 이제야 끝이나듯, 원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일어날 일들이었다. 그럼 나는 그 순간 상처를 잘 쥐어짜고 덧나지 않도록 잘 닦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이라고 막을 수 없듯이, 잘 씻겨주고 말려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사람일이라는게 참 그렇다. 일어날 일이라 일어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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