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의 플롯은 내 인생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든다. 언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일이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더 긴장을 하면서 지내곤 한다.
주 5일 나이트 근무 3일째, 출근 전에 안깨고 7시간이나 잤고, 가기 전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요깃 거리도 샀다. 이상하게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아침에 퇴근하면서 잠깐 본 매니저가 '잘 하고 있으니 혹시 힘든거 있음 말해라, 동료들이 다들 너를 너무 좋아하더라.'라는 말에 출근하면서도 붕붕 뜨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서 뭐든 할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워워시키고 명상까지 하고 출근을 했다.
밤새 바삐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면 오늘은 환자도 어느정도 알겠다, 조금 살살 쉬엄쉬엄 하자는 생각이 가득찼다. 오늘 이후로 이틀 연속 또 다른 병원에서 근무를 하려면 에너지를 어느정도 조절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근 때 부터 방방 뜬 마음에 이상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사람들의 표정 손짓 표현이 모두 엄청나게 강하게 느껴졌다. 십분 정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했다. 브레이크도 알아서 가고, 리소스 널스에게도 나름 브리핑을 잘 했다고 생각을 했다.
이 후 새벽에 입원한 베트남 할아버지는 치매가 있다고 했다. 곤히 주무시는 모습에 너무 괜찮다고 생각하며 딸을 통해 정보조사를 했다. 지친 딸이 귀가를 재촉하며 할아버지에게 시터가 필요할 거라고 귀뜸을 해 주고 갔다. 너무 잘 주무시던 할아버지는 중간에 깨서 갑자기 역정을 내셨다. 어랄라.. 침대에서 나와서 어디론가 가려고 갑자기 옷을 훌렁 다 벗고는 격노를 했다. 넘어질까 막았더니 되려 손찌검을 하려고 하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다. 어찌저찌 남자 도우미가 할아버지를 잘 타일러 화장실에 다녀오게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할아버지는 갑자기 온순한 양이 되어 "땡큐"를 남발을 했다. 그리고 아주 차분하게 침대에 누웠다. 좀 쉴수 있겠거니 하고 다시 간호사실로 가서 나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수액이 들어가는 동안 계속 알람이 울려서 몇번 가봤더니 팔을 구부리고 계셨다. 하필이면 딱 그자리라 어쩔 수 없이 주사를 새로 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심스레 가서 주사도 놨는데 정말 1분만에 IV를 새로 시작했다. 크아 나의 능력이란 하면서 기분이 마구 업되는게 아닌가. 환자도 잘 자고 이제 차트 좀 보다가 아침 약을 돌리면 되겠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환자 중 한 분 생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차지에게 말했더니 이병원은 환자 생일날 기프트샵가서 100불 미만의 선물을 사서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서 사올 수 있음 선물을 사오라는 거다 � 정말 재밌는 병원이다. 누굴 보내려고 하니 다들 바쁘다고 하고 가기 싫어하고, 해필 담당 간호사는 나고 뭐라 무시할 수는 없고, 그 까이것 한번 가보지 하고 병원 1층 기프트샵을 들어가서 환자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선물할 것도 종류가 몇 없었다. 스카프, 악세서리, 꽃, 카드, 각종 인형 등등 70세 노인에게 인형을 선물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산소치료를 하는 환자에게 꽃을 사주기도 뭣해서 겨우 골른게 진주 팔찌 악세서리랑 스카프정도였다. 그리고 꽃 모양처럼 조립되는 팝업 카드. 같이 간 동료들이랑 리테일 테라피 하는 것 마냥 이것저것 추천해가며 선물을 골랐다. 그리고 병동으로 가서 chat GPT를 이용해서 정성스레 편지도 썼다. � HAPPY BIRTHDAY 라며..
이제 퇴근까지 한시간 벌써 새벽 6시였다. 격리방에 들어가 환자 약을 줄 때 즈음이었나. 갑자기 채혈사에게 전화가 왔다. 베트남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려는데 할아버지가 때리고 난동을 피워서 못들어갔으니, 채혈할 때 같이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격리방에 있으니 나중에 다 돌고 갈 때 즈음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격리방서 항생제를 연결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차지널스를 포함해서 8명가까이가 베트남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있었다.
알고봤더니 할아버지가 난동을 있는대로 부려서 리소스 간호사도 발로 차고, 주삿바늘도 쥐어 뜯고, 심장 모니터링하는 텔리기계 박스도 윙윙 돌려서 저리 던져버릴 정도로 난리를 피웠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보안요원까지 모두 출동한 상태. 베트남어는 못알아듣겠고, 할아버지도 영어를 못알아들으시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어는 못 알아들어도 할아버지 하는 행동상 "예끼 이놈들아!!"하면서 삿대질에 눈을 부릅뜨시고 난리도 아니었다. 다른 것 보다 동료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르겠었다. 내가 갔더니 어느정도는 진정된 상태인데 할아버지가 당장 날라차기를 할 것 같이 난리도 아니었다. 아니 전신 쇠약으로 입원하신 분에다가 워커 사용해서 걸었다던 분이, 이렇게 정정하시다니, 당장 집에가셔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간 못 잔 수면과, 못먹었던게 수액으로 충분히 보충이 되니 살만해지신건지 걸어다니는 걸 보니 정말 날라다닐 수준이었다. 인간의 뇌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치만 동료들에겐 여전히 너무나도 미안한 상태. 리소스 널스가 자기가 남자가 아닌게 다행이라고 한 걸 보니 어딜 쳤는지 짐작도 할 수준이었다. ㅠㅠ 정말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와중에 격리방 환자 시술가야하는데, 동의서가 안되어있다고 계속 전화가 오는 거였다. 동시에 채혈사도 계속해서 전화가 와서 환자를 잡아달라고 하는 상황. 채혈사랑 치매환자 채혈하는거 도와주는 중에도 전화가 와서 인계달라 뭐해달라 계속 전화하길래. 내가 지금 치매환자 때문에 너무 바쁘거든, 혹시 동의서 10분내에 받아줘도 될까?라고 물었더니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 저찌 받았더니, 또 전화가 와서 사인 다시 하라 그러고 진짜 몇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결국 환자 모시러 오더니 그 간호사가 나한테 동의서 다시 받았냐고 묻는거였다. 가만보니 내가 이 간호사 일을 대신해 주는 느낌이 바짝 들었다. 게다가 지금 시간은 벌써 7시 나는 나이트라 얼른 인계주고 퇴근해야 하는데, 끝까지 지금 동의서를 다시 받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치매환자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는 상태다. 너네는 과에서 동의서를 안받냐? 물었더니 자기들도 받는단다. 근데 병동에 있으니까 너네가 받아야지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거다. 그분에게 정중하게 이런말 하기 정말 싫지만, 지금 다시 받으려면 너무 많은 스텝이 필요하고 내가 할것이 너무 많다. (왜냐하면 통역 기계 가지고 와야하고, 컴퓨터 가져와야하고, 아이패드 가져와서 컴퓨터를 또 스캔해야 한다. 그러니 너무 많은 스텝, 게다가 환자에게 또 설명하고 또 받고 진짜 환자에게만 몇 번 방문했는지,, 그래서 아예 시술장에서 받는게 더 확실하고 환자에게도 동의서를 받기에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했다. 동의서 안되어 있으면 사실 수술장에서도 받는다. big deal 이 아님.그래서) 혹시 너네가 받아줄 수 없냐? 라고 했더니 똥씹은 표정으로 'what can we do' 라는 그녀. 오늘 스펙타클했던 1시간 중 이분의 태도가 나의 기분을 겉잡을 수 없이 망쳤다.
그리고 나서 인수인계를 주는 도중, 동료 환자의 rapid response 가 터졌다. 드라마도 이렇게는 못만들겠다 싶을정도로 정말 스펙타클한 2시간이었다. 오늘따라 동료들이 모두 고생하는 상태. 결국 rapid response는 DNR 이라 뭘 안하는 듯 했지만, 밤새 할아버지와 씨름하고 동의서 때문에 타과 간호사랑 씨름하고 선물사느라 에너지는 완전 바닥이었다. 거의 녹초가 되어서 생일인 환자 인계를 주고 모닝 간호사와 같이 라운딩을 가서 정성스레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선물도 주고 카드도 읽어줬다. 바쁜 와중에 투자한 5분이었다. 환자가 너무 좋아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차암, 선물사러 갈때는 굳이 이런 일을 해야하나 싶었지만 막상 하고 나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I use my charm 이라고 하면서 선물을 공개하는게 그렇게 신나는 일이었다. 환자가 '집에가서 잘 쉬고 오늘 밤에 또 봐!'라고 하길래 '나 오늘은 오프라서 안와~ 그치만 내가 왔을 땐 너가 퇴원해서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 했다. 환자가 울컥하길래 나도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알러뷰~~ 라고 하고 나왔다.
마무리는 따스하게 끝났지만 정말 스펙타클한 밤이었다. 이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에서 근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정말 여러모로 한국같기도 하면서 아닌거 같기도 한 참 신기하고 재밌는 병원이다. 주 5일 나이트 근무 지금 실성할거 같긴 한데, 오늘 밤은 좀 낫길 바라면서 lunar eclips 와 일어난 이 신기한 밤의 일을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 남기고 잠에 들려고 한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정말 많은 일이 있으려고 그런거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