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서 맞이하는 세번째 가을이다.
첫 해는 가을같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이게 가을인가? 하면서 지나갔고
두번 째 해는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겨울이 되었던 것 같다.
세번 째 가을을 맞이하는 요즈음 신기하게 가을답게 날씨도 crispy하고, 하늘도 더 높은 것 같고 밤이 되면 쌀쌀해지고 추워지는게 딱 한국에서의 가을을 맞이할 때의 설렘이 튀어나왔다
밤이 되어 켜켜이 담요를 두르고 일을 하는 우리를 보며, 알라스카에서 온 친구는 '이 캘리포니아 나약한 사람들'이라며 비웃었지만 정말로 해가 갈 수록 캘리 날씨에 적응되어 사시사철 해가 쨍쨍해도 그 해의 온도와 밝기가 달라지는게 서서히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조깅을 할 요량이었지만 서둘러 할일들이 있어서 동네 근처 커피샵에서 커피만 사서 좀 앉아있다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보던 사람들,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재촉하지 않으며, 지나가다가 서로 양보하는 차들을 보니 아 여기가 미국이었지 하고 실감을 하게 된다.
아침 10시에 동네 카페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나와는 다른 인종인 사람들
한국에서도 비주류로 살았지만, 여기서도 비주류로 살다보니 이제는 비주류의 삶이 상당히 익숙해 진다.
집에 들어와서 요거트와 견과류를 꺼내 크로아상에 올렸다.
미니 홈팟에서 재즈음악이 흘러나왔고, 맥북에선 알람이 울린다.
최신 기계로 이루어진 방 안을 보니 어라 문득 이게 내가 원했던 삶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꿈이라는게 점점 사라졌지만, 아주아주 어렸을 때 나는 내 30대를 커리어우먼의 삶으로 꿈꿔왔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읽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안경을 치켜 올리며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서 정장을 입고 바쁘게 회사로 출근하는. 그것과는 다르게 미국 병원에서 밤을 새워 환자들을 응대하고 퇴근한 날 하루종일 미친듯이 잠만자다 일어나는 삶이긴 하지만, 내가 방금 지내 온 약 2시간은 내가 완연히 꿈꿔왔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와서 한 2년 동안은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와보니 주위가 좀 달라보인다. 동네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사람들도 다 고만고만해 보이고. 마냥 신나고 마냥 즐겁지 않아도 그 자체로 여유있고 힘이있는.
아마 어렸을 때의 나는 이 2시간만을 생각하며 꿈꾸는 삶이라고 그렸을 수도 있다. 이 외의 시간은 모두가 그렇듯 매우 치열하고, 가끔 치졸해지기도 하고, 퇴근하다 불현듯 정신없이 울어재끼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본 사소한것에 기뻐하기도 하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혹은 10분의 찰나건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난 3일의 쉬프트가 여전히 엄청나게 힘들었어도, 앞으로 있을 오프가 달콤하리란것은 순간이라도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참 좋은 일임을.
그러니 이게 인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