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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유니 Dec 01. 2023

가난한 아빠의 마지막 선물

아빠가 남긴 생에 마지막 선물  

11월22일(음력10월10일_소설)

겨울을 타고 온 바람이 차가웠다. 하지만 땅그늘 아래로 따뜻한 햇빛이 쏫아지던 날이었다. 친정엄마가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함께 일하는 삼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아빠 위독하시다. 급하니까 오빠들에게도 소식 알려라."

" 네?! "


삼춘의 전화를 받고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곧 장 오빠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날은 오전부터 아이들의 병원 일정이 있었다. 소아과를 들러 감기약을 받아오는것 을 끝으로 집에 돌아오던 찰나였다. 삼춘에게 받은 소식은 비보 였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지금병원이세요?"

"아빠가...아빠가...숨을 않쉰다....흐어어어...."


핸드폰 넘어로 엄마의 흐느끼는 목소리와 울음소리가 전해졌다.




아빠는 원래 지병이 있으셨다. 삼십대에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기적 적으로 회복하셨다. 회복이 되신후 육십세가 되기전 까지는 건강하신 편이었다. 육십세 이후로 뇌혈관이 않좋아 지면서 정기적인 병원진료를 받으셨다. 그리고 최근 1년 전 경증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하지만 건강이 점점 좋아지던 터였다. 진단서를 확인하지 않으면 치매인지도 알수 없을 만큼 인지력도 좋으셨다. 엄마아빠께 의미있는 일을 해드리고 싶었다. 올해 9월, 친정가족들 모두 모여 가족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엄마아빠의 장수사진도 찍어드렸다.


" 장수사진 찍으시면 오래 사신데요. 오래사셔야 해요. 아버님 어머님!"


오빠들의 처 새언니들이 한마디 씩 거들었다. 가족사진을 찍으며 모두 많이 웃었다. 건강해지신 아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결혼사진을 다시 찍고 싶으시다던 엄마의 소원도 이뤄진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행복한 눈물을 흘리셨다. 아빠의 지병으로 가난했던 우리가족은 엄마의 희생으로 모든게 서서히 괜찮아졌었다. 이제는 우리가족 함께 행복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정말 행복했다.  




"여보...아빠가 아무래도 돌아가신거 같아..."


그날은 남편도 휴가였다. 소아과에서 돌아온 후 부랴부랴 짐을 샀다. 그리고 자동차로 5시간이 걸리는 시골로 무작정 향했다. 가는 내내 차안은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남편은 운전을 하느라 말이 없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고없이 찾아온 이별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걸 믿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저 왔어요! 엄마 괜찮으세요?"

"응급실에 몹쓸 모습으로 누워있는 니네아빠 바라보면서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기도했는데.....흐어어"


엄마는 이미 눈물을 많이 흘리신 후 였다. 매우 지쳐 보이셨다. 내 손을 잡고 또 눈물을 흘리셨다.

아빠의 빈소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오빠들과 가까운 친인척들도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영정사진과 정면으로 마주하던 순간이었다. 아빠는 가족사진을 찍었던 그날처럼 웃고 계셨다.


사실 나는 어릴적부터 아빠와 깊은 유대감은 없었다. 무뚝뚝 하고 때론 너무 이기적이었던 아빠를 미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원망도 했었다. 그러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결혼 전보다 아빠를 찾아뵈는 날들이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아빠가 미웠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아빠를 이해할수 있었다. 그리고 어릴적 쌓지 못했던 유대감을 아빠와 쌓아갈 날을 계획했었다. 늦게라도 아빠에게 보상받고 싶은 심리였다. 그런 내마음을 알아차리셨을까? 어느날 부터 한번도 않하던 나의 안부를 전화로 묻기도 하셨다. 매번 같은 질문만 하시는데도 내심 아빠의 안부전화가 반갑기도 했었다.


'아빠...정말 돌아가신게 맞아요? 저희랑 내년에 못갔던 제주도 대신 가까운곳에 놀러가쟈고 약속 하셨잖아요.

아빤 여전히 이기적이 시군요.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준비도 없이....'


한참을 아빠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아빠는 여전히 웃고만 계셨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11월22일(음력10월11일_추수감사절)_입관


그리웠다. 내 물음에 답하지 않는 아빠가 그리웠다. 보고싶었다. 아빠의 모습을. 아빠의 얼굴을. 살면서 아빠를 그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설령 있었다 해도 기억이 나질 않을 만큼이다. 아빠에 대한 용서와 사랑보다 늘 미움이 아빠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미움의 씨앗은 꽃씨가 되어 흩날렸다. 나의 아이들과 남편에게 흩뿌려 졌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증오사이를 오가며 홀로 혼란스러운 날들이 많았다.


입관하시는 아빠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영정 사진이 아닌 실제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빠는 평상시처럼 편안한 얼굴로 주무시고 계셨다. 흔들어 깨우면 당장이라도 눈을 뜨실것만 같았다. 혹씨라도 일어나실까 손을잡고 한참을 흔들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아빠의 손을 잡아 드렸던게 도대체 언제 였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따뜻하게 손한번 잡아드린 적이 없었던 거였다.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아빠의 손을 내내 붙잡고 울고 또 울었다. 세상을 떠난 자는 말이 없다. 남아있는자의 미련과 후회가 밀려와 슬픔이라는 가면을 쓸뿐인다.


11월23일(음력10월12일)_발인


겨울바람을 타고 가느다란 가랑눈이 내릴것만 같은 날이었다. 아빠가 발인하는 시간은 조금 늦은 시간인 9시30분이었다. 10시쯤 선산에 도착했다. 아빠는 평소에 산소에 가시는걸 좋아 하셨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난 아빠를 기리고자 했다. 아빠의 형제들 중 작은아버지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아랫 동생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큰아버지들은 마지막 남은 아랫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셨다. 아빠의 자리는 친할아버지 와 할머니의 옆자리였다. 가장 전망이 틔이고 양지바른 자리였다.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불가능 했을 자리였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 한번만 만져보고 싶다."


엄마는 태초의 자리로 돌아가시는 아빠를 보면서 내내 보고싶다며 오열을 하셨다. 아빠는 살아생전에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다. 사랑이 지나처 집착이 될만큼 사랑하셨다. 자식들보다 엄마와 자신이 먼저 였다. 아빠는 엄마에게 미안하셨던 걸까? 자신때문에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러웠던 걸까? 그래서 마지막은 건강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으셨던 걸까? 그 대답을 듣고 싶지만 들을수가 없다.

아빠의 묘가 완성되어 가자 슬퍼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듯, 엄마의 머리맡위로 따뜻한 햇살이 한참을 내리 쬣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왔던 우리 아빠. 살아생전에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마음껏 풍족을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지금내가 그러하듯 아빠의 마음도 똑같으셨을 것이다. 자신의 몸뚱이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아빠의 삶이 애잔하다. 그리고 아빠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진리의 깨달음을 선물하고 가셨다.


오늘도 소신껏 잘 살아내고,  언제나 사랑이 넘치길 바란다 딸아.

아빠의 짧은 여생은 기적같은 회복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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