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

첫 단편 소설

by 김성수

[1부 - 주현의 시선]


달콤한 냄새는 일이 되면 지겨워진다.


주현은 오늘 세 번째 도넛 가게의 문을 밀고 나왔다. 손에는 방금 산 도넛 상자와 오렌지주스가 든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늘 할당량은 다섯 군데. 아직 두 곳이 더 남았다. 미스터리 쇼퍼라는 직종은, 멋진 이름과 달리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 가까웠다. 억지 미소를 짓고, 매뉴얼에 따라 직원의 친절도를 체크하고, 가게의 위생 상태를 빠르게 훑어봐야 한다. 그리고 필요 없는 음식을 사는 과정의 반복.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 시작하는 이 아르바이트는 그녀에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동시에 새로운 굴레였다. 손에 들린 봉지들이 묵직했다. 이 달콤한 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집에 가져가 봐야 남편도, 아이도 물린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 뻔했다.


그때였다. 낡은 빌라들이 이어진 좁은 골목 어귀, 시멘트 화단 턱에 한 할머니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햇볕도 들지 않는 그늘 속에서, 지친 표정으로 오가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

순간, 연민이 스쳤다. 그리고 곧바로, 이 도넛 봉지를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저분 드리면 되겠다.'

완벽한 선의가 아니었다. 이 달콤한 짐을 덜어내고 싶은 이기심이 6할, 할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이 4할쯤 섞인,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였다.


주현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봉지를 내밀었다.

"할머니, 이거 드세요. 방금 산 거예요."

할머니는 놀란 눈으로 그녀와 봉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유명한 도넛 가게 건데, 맛있어요."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그럼요. 저는 너무 많아서요."


주현은 봉지를 할머니의 무릎에 살며시 올려놓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할머니가 "처음 먹어보는 건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두 손이 가벼워지니,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주현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으며,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선행'일까, 아니면 '짐 처리'였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어느 쪽이든, 어쨌든 좋은 일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부 - 점례의 시선]


무릎이 시큰거렸다.


점례는 낡은 화단 턱에 앉아, 하염없이 골목 끝을 바라보았다. 자식들이 떠난 뒤, 이 골목은 그녀의 세상 전부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식당 일이든 파출부 일이든 안 해본 일 없이 남매를 키웠다. 내 입에 들어갈 것 아껴가며 그들의 입에 넣어주었고, 내 옷 한 벌 사지 않고 그들의 교복을 입혔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은, 이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나 생일이 아니면 얼굴 한번 비추기 힘들었다. 어쩌다 동네 할망구들 모임에 나가면, 자식들이 사줬다는 백화점 옷이며, 이름도 어려운 외국 과자 자랑에 귀만 아팠다. 점례는 평생, 자식에게 그런 것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멍하니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점심은 찬밥에 물 말아 김치 한 조각으로 때운 뒤였다.

그때, 젊은 새댁 하나가 다가와 불쑥, 봉지를 내밀었다. 유명한 도넛이란다. 봉지 안에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동그란 빵과 주스가 들어있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보니, 젊은 새댁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점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TV에서나 보던, 예쁜 모양의 빵이었다. 한입 베어 무니, 입안에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확 퍼졌다. 평생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운 좋은 날이네.'

점례는 도넛을 한입 더 베어 물며 생각했다. 남들은 자식들이 사다 줘서 먹는다는 그 귀한 것을, 나는 길에서 얻어먹는구나.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그녀는 남은 도넛을 아껴가며 천천히 먹었다. 혹시라도 이따 늦게 아들이나 딸에게서 전화가 올지도 모르니, 그 달콤한 자랑거리를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오늘도 전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도넛의 마지막 조각이 입안에서 다 녹아 사라졌을 때, 점례의 입안에는 달콤함 대신, 다시 익숙한 씁쓸함이 고였다. 그녀는 다시, 하염없이, 골목 끝을 바라보았다.




[작가의 말]

첫 단편 소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잠깐의 자유와 예상치 못한 음식들을 안겨주었다.

도넛, 빵, 음료수 같은 것들.

처음에는 그것들이 그저 반가웠다.


그날도 손에 도넛 봉지를 들고 골목을 지나가다

기운 없이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봉지가 거추장스러웠고, 다음 장소로 서둘러야 했고,

연민과 편의가 섞인 마음으로 그분께 도넛을 건넸다.


환하게 웃으시던 눈빛을 뒤로한 채 돌아서며

나는 작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반백의 나이가 된 지금,

문득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음식만 건네고 자리를 뜨지 않았더라면,

잠시라도 곁에 앉아 말을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이 이야기는 그때의 선의와,

뒤늦게 찾아온 아쉬움 사이에서 태어났다.

완전하지 않았던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날의 도넛은 사라졌지만,

그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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