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uman Library] #2
"까짓것, 못할 게 뭐 있나."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손주 영어 교재를 새로 사서 공부하는 분이 계신다. 복지관 식당에서 만난 김주임님의 이야기다.
처음 뵈었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우리가 흔히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 하면 떠올리는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우아함과 경쾌함을 동시에 갖춘, 마치 '강남 사모님'의 아우라를 풍기는 분이셨다.
그 짐작은 사실이었다. 강남의 유명한 아파트에 거주하셨고, 남편분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출판사에 다니셨다. 그런 분이 어째서 복지관 식당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계신 걸까.
어느덧 가까워진 어느 날, 나는 참지 못하고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되셨어요? “
"아, 나 여기 복지관에서 영어 강좌를 들었거든. 근데 식당 직원을 구한다길래 바로 지원했지."
"아니, 조리라는 게 힘든 일이잖아요. 해보신 적도 없는데 덜컥 지원하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그때 둘째가 유학 중이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거든. 처음 하는 일이지만, 까짓것 못할 게 뭐 있나 싶었지."
그 명쾌한 대답 속에 이분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전문 조리사는 아니었지만, 음식 솜씨는 뛰어났다. 무엇보다 늘 직원들을 위해 새로운 메뉴를 고민하는 마음이 음식에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어느 날은 "오늘 날씨가 쌀쌀하니까 따뜻한 국물이 좋겠다"며 특별히 육개장을 끓여주셨고, 또 어느 날은 "특별한 요리가 필요해"라며 양장피를 준비해 주셨다.
하지만 식단의 맛보다 더 빛났던 것은, 이분 자체가 뿜어내는 긍정의 에너지였다. 아침 일찍 출근해 혼자서 모든 준비를 하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없이 환하게 웃던 모습.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입맛을 기억해 "김 선생님은 매운 거 못 드시니까 따로 챙겼어요"라며 세심하게 마음을 쓰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느새 식당은 직원들의 비공식 상담소가 되어 있었다. 업무로 지친 동료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으면, 언제나 마법 같은 처방전이 날아왔다.
한 번은 한 신입 사회복지사가 담당 어르신과의 갈등으로 고민을 털어놓았다."어르신이 너무 까칠하셔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그 어르신도 다 이유가 있을 거야.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를 아직 못 찾았을 뿐이지. 걱정할 시간에 그냥 한번 더 해보면 어때."
며칠 후, 그 직원이 환한 얼굴로 와서 말했다."정말 어르신이 마음을 여셨어요!"
또 다른 동료가 집안일로 불안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이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내가 기도해 줄게." 그 따뜻한 위로는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특효약이었다.
복지관을 그만둔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이분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어느덧 은퇴해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가 되셨지만, 여전히 놀라운 분이다.
최근 통화에서 들은 이야기도 그랬다. "요즘 손주 영어 공부를 직접 봐주고 있어. 어린이 영어 교재도 새로 사서 공부하고 있지." 단순히 아이를 돌보는 수준을 넘어, 직접 영어를 가르칠 정도의 '고품질 양육'을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는 그 열정이 경이로웠다.
문득 삶이 버겁거나 지치는 날, 나는 여전히 전화를 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긍정의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듯하다.
"요즘 어때? 많이 바쁘지?" 평범한 안부 인사에도 특별함이 있다. 건성으로 묻는 법 없이, 정말로 내 상황을 궁금해하고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들다는 기색을 보이면, 여전히 그 특유의 처방전이 날아온다.
"그럴 땐 너무 생각하지 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다 잘 될 거라니까."
이분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대단한 조언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보면 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믿음으로 살아갔을 뿐이다.
그 믿음은 놀라운 전염성이 있었다. 곁에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피어났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한 번 더 시도해 볼 용기가 생겼다. 지금도 힘든 순간이 오면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까짓것, 못할 게 뭐 있나."
내게는 살아있는 비타민이자, 영원한 긍정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해 준, 내 삶의 소중한 인생 선배이다.
다음 주 목요일 저녁 8시,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연재를 구독하시면 새 글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어요.
1편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