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살아 남았다.
김다람은 오늘도 출근길 지하철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목적지는 회사가 아니라, ‘정글’이었다. 그 정글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김미선 대리. 흔히들 ‘기분파’라고 불렀지만, 다람의 사전에 그녀는 ‘미친놈 질량 보존의 법칙’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미친년’ 그 자체였다. 이 법칙은 간단했다. 세상 어디에나 미친놈의 총량은 일정하며, 특히 한 회사에 오래 박혀 있을수록 그 농도가 진해진다는 것. 김미선 대리는 회사에 10년 이상을 뿌리박은, 거의 이무기 수준의 미친년이었다.
그녀의 감정 기복은 롤러코스터도 울고 갈 수준이었다. 어제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람에게 "다람 씨, 나 정말 다람 씨 같은 후배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라고 했던 사람이, 오늘은 허공에 대고 "야! 이거 미친 거 아니야?!"라고 소리치고 있는 식이었다.
다람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저 미친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운동이라도 시켜야 하나.'
다람의 좌우명은 '일개 다람쥐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산다'였다. 특히 김미선 대리 앞에서만큼은 투명 인간이 되려 노력했다. 그녀에게 잡힐 만한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제1의 생존 전략이었다. 업무는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보고서엔 오탈자 하나 없게 검토했다. 그녀의 잔소리 레이다에 걸리는 순간, 다람은 '미친년'으로 진화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 뻔했다.
어느 날 오후, 다람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격앙된 고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지금 처리 상황이 이게 뭐예요? 담당자 바꿔요, 당장!" 다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필 이 컴플레인의 담당자가 김미선 대리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가는 '미친년'으로 찍힐 게 분명했다. 어제 있었던 '사건 1'이 다람의 뇌리를 스쳤다.
안타까운 사례: 전화를 끊고 김미선 대리에게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가 "손님이 그런다고 그걸 전하는 넌 뭐니? 별 그지 같은 미친년을 봤나?"는 폭언을 듣고 미친년 딱지를 얻은 김사원.
다람은 심호흡을 했다. '아니야, 김다람! 이럴 때야말로 '현명한 다람쥐'가 되어야 해!'
그녀는 침착하게 고객에게 말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의 소중한 말씀을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들은 내용을 토대로, 연차가 높고 유능한 분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고객은 잠시 주춤했지만, 다람의 공손한 태도에 다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람은 고객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김미선 대리에게 직접 연결한다? 미친 짓이지. 그렇다고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때, 다람의 눈에 김미선 대리의 맞수, 이재훈 과장이 들어왔다. 이재훈 과장은 김미선 대리가 유일하게 기싸움을 벌이는 상대였다. 둘은 같은 해 입사했지만, 업무 스타일부터 성격까지 극과 극이었다. 김미선 대리가 감정의 파도를 탄다면, 이재훈 과장은 시베리아 벌판의 단단한 얼음 같았다.
다람은 속삭이듯 고객에게 말했다. "고객님, 말씀 감사합니다. 방금 말씀해주신 내용을 토대로, 이 업무에 가장 정통하신 이재훈 과장님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이재훈 과장의 내선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들림과 동시에 다람은 속으로 외쳤다. '제발 받아라, 과장님!'
"네, 이재훈입니다."
"과장님,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고객 연결을 좀 부탁드립니다." 다람은 상황을 최대한 간결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김미선 대리님 관련 컴플레인인데, 제가 신입이라 잘 모르겠어서요. 과장님께서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재훈 과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왠지 모르게 비장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연결하세요."라고 답했다. 다람은 재빨리 고객에게 "고객님, 이재훈 과장님께 연결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기쁜 마음으로 통화를 넘겼다.
수화기 너머로 김미선 대리와 이재훈 과장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다람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이후의 일은? 다람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오늘도 무사히, 자신의 책상에서 조용히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날 이후, 김다람의 '투명 인간' 전략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녀는 김미선 대리의 감정 폭발에 맞대응하지 않았고, 업무 외적인 교류는 최소화했다. 김미선 대리가 허공에 대고 "어휴, 진짜 돌겠네!"라고 소리쳐도, 다람은 묵묵히 키보드만 두드렸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고, 귀는 들리지 않는 척 벽을 향해 있었다. 마치 자신은 김미선 대리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아주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인 양 행동했다.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미선 대리가 "다람 씨,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 나 어제 저녁에 짜증 나는 일 있어서 오늘은 맛있는 거 먹어야 하는데!"라고 말을 걸어오면, 다람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리님,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쏜살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점심시간은 단순한 식사 시간이 아니라, '김미선 대리 회피 작전'의 중요한 작전 시간이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김미선 대리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럴 때는 '너 내 밥이야'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칭찬을 건네야 했다. "다람 씨, 역시 다람 씨는 내가 정말 마음에 들어. 너 같은 후배가 있어야지!" 다람은 속으로 '예, 대리님 밥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싱긋 웃으며 "대리님께 칭찬 들으니 힘이 나네요!"라고 답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빌미를 주지 않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을.
하루는 김미선 대리가 갑자기 다람의 자리로 와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람 씨, 나 어제 회사에서 너무 열받아서 잠을 한숨도 못 잤어. 우리 팀장님 말이야, 정말 미친 거 아니니?"
다람은 잠시 망설였다. 평소 같으면 "아… 그러셨어요…" 하고 말았겠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김미선 대리의 눈빛에는 진심으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리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회사 근처에 스트레스 푸는 데 좋은 맛집이 있는데, 퇴근 후에 같이 가보실까요?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전환이 좀 되실 거예요."
김미선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다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어머! 다람 씨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좋아, 좋아! 콜! 역시 다람 씨는 센스가 있다니까!"
그날 저녁, 다람은 김미선 대리와 함께 매운 닭발을 먹었다. 김미선 대리는 매운 닭발을 뜯으며 팀장 욕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다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나자 김미선 대리의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람은 깨달았다. '미친놈 질량 보존의 법칙'은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는 그 '미친놈'도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이것이 매번 통하는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상대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 또한 하나의 현명한 대처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김다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가끔 김미선 대리의 감정 폭발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다람은 이제 더 이상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터득했고, 가끔은 '미친놈'에게도 한 수 양보하는 여유를 부릴 줄 알게 되었다. 이 정글 같은 직장에서, 일개 다람쥐 김다람은 오늘도 슬기롭게 살아남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늘 미친놈들이 산재해 있지만, 현명한 다람쥐는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슬기로운 하루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