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다람 회사 지옥에서 살아남다.
김다람은 오늘도 조용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미친놈 질량 보존의 법칙'을 온몸으로 깨달은 그녀는, 이제 '일개 다람쥐'를 넘어 '정글의 현자'로 진화 중이었다. 오늘의 정글에는 새로운 포식자들이 등장했다. 바로 염라대왕 같은 김민준 팀장과 온갖 소문을 옮기는 '스피커' 최수진 대리였다.
김민준 팀장은 말 그대로 '무조건 내 거야!' 병을 앓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의 아이디어나 성과는 기가 막히게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켰다. "B야, 혹시 자료 정리한 거 있어? 아니 아침부터 고객이 전화가 얼마나 오는지, 나 너무 바빠서 그러거든? 자료 좀." 그의 입에서 나온 '자료 좀'은 곧 '네 자료 내 거야'라는 뜻이었다.
다람은 속으로 비웃었다.
'염라대왕님, 제가 만만한 다람쥐로 보이시나요? 이제는 다람쥐도 진화합니다.'
며칠 전, 다람이 밤샘 작업으로 완성한 중요한 고객 제안서가 있었다. 김민준 팀장은 기가 막히게 그걸 알아채고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김다람 씨, 그 제안서 마무리됐어요? 내가 최종 검토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역시 내가 나서야 일이 빨리 진행되지."
다람은 싱긋 웃었다. "팀장님, 역시 염라대왕 아니 김민준 팀장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제안서는 어제 김상무님께서 직접 전화하셔서 '다람 씨가 총대 매고 진행하라'고 지시하신 거라, 중간 보고도 김상무님께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혹시 팀장님께서 상무님께 직접 피드백 드릴까요?"
김민준 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무조건 내 거야!' 병은 상무님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 앞에서는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다.
다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훗, 명분이 없으면 아무리 염라대왕이라도 힘을 못 쓰지.'
그녀는 이미 제안서 업무 시작 전에 김상무님께 간단히 보고 메일을 보내 피드백을 받아둔 상태였다. 다소 '약아빠져' 보일지라도, 이 물밑작업은 염라대왕을 길들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스피커' 최수진 대리였다. 그녀는 팀 내 모든 대화를 옮기는 메신저였다. 심지어 사적인 단톡방에서 나눈 내용까지 상위 임원들에게 보고(?)하는 특 까지 있었다. 얼마 전에는 회식 때 삼겹살 말고 다른 메뉴를 먹고 싶다고 다람이 장난 삼아 올린 글을 보고, 한 임원분이 "너네들 회식 때 고기가 그렇게 싫었어?"라고 물어봐 다람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다람은 이제 단톡방에서 웬만하면 눈팅만 하고 의견 개시는 자제했다. 그러나 스피커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다람은 역으로 스피커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회식 메뉴를 정하는 날, 최수진 대리는 어김없이 "다람 씨, 다음 회식 뭐 먹을까요? 지난번에 상무님이 고기 싫어하냐고 물으시던데…."라고 말을 걸어왔다.
다람은 반색하며 말했다. "대리님! 마침 잘 오셨어요! 제가 얼마 전에 회사 근처에 진짜 대박 횟집을 발견했어요! '바다의 보물'이라고. 삼겹살집 회식비보다 20%는 저렴할 거 같은데, 양도 엄청 푸짐하고 룸도 엄청 넓어서 단체 회식에 딱이더라고요! 회도 엄청 싱싱하고!"
최수진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그래요? 진짜? 20%나 저렴하다고요?" 그녀의 눈은 이미 회식비 절감이라는 새로운 정보에 반짝이고 있었다.
다람은 쐐기를 박았다.
"네! 부장님께 이 횟집 추천하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역시 부장님이라 그런가 '끗발' 좋으신 거 같아요! 저희는 부장님만 믿습니다!!"
며칠 뒤, 팀 회식은 '바다의 보물' 횟집에서 열렸다.
최수진 대리는 연신
"이 횟집 제가 추천했어요!"
라며 뿌듯해했고, 부장님은
"오~ 최 대리 덕분에 좋은 곳 왔네! 회가 아주 싱싱해!"
라며 만족해했다. 다람은 속으로 씩 웃었다.
'역시 스피커는 내가 원하는 바를 옮기는 데는 최고야.'
그러나 '스피커'에게 너무 많은 '떡밥'을 던지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을 다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스피커의 습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최수진 대리가 또 다른 팀원의 사적인 대화를 임원에게 옮기는 바람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다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최수진 대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람은 팀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약간 크게 말했다.
"어휴, 얼마 전에 상무님이 저희가 고깃집 싫어하냐고 물으실 때 진짜 소름 돋았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부장님이 대신 말씀해주셨나 봐요? 이런 거 대리님만 말씀드릴 수 있잖아요? 다음에 보고하실 때는 다른 데도 가자고 이야기해 주세요. 역시 대리님이라 그런가 '끗발 좋으신 거' 같아요. 대리님 최고! 저희는 대리님만 믿습니다!!"
다람의 말에 팀원들은 슬쩍 웃었고, 곧이어 자리에 돌아온 최수진 대리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졌다. 다람은 최 대리에게 직접 말하는 대신, 다른 팀원들에게 들리게끔 공개적으로 '칭찬'을 함으로써, 그녀에게 부담감을 지우는 방법을 택했다.
'네가 옮기는 모든 말은 곧 너의 책임이 된다'
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이후로 최수진 대리는 단톡방에서도, 실제 대화에서도 불필요한 말을 옮기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그녀는 '끗발'이 주는 부담감에 스스로 스피커 역할을 축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 지옥은 여전히 존재했다. 염라대왕은 여전히 자신의 것을 탐했고, 스피커는 가끔씩 여전히 정보를 옮겼다. 하지만 김다람은 이제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물밑작업'으로 염라대왕의 욕심을 제어했고, '역이용'으로 스피커를 길들였다. 때로는 화를 유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요^^'라며 능청스럽게 잔업을 피했다.
김다람은 깨달았다. 회사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 지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옥의 규칙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생존 전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더 이상 '일개 다람쥐'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옥을 헤쳐나가는 '생존의 달인' 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슬기로운 회사생활을 위해! 이 지옥에서 당신도 함께 살아남기를 바란다. 다음 지옥문은 어디에서 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