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존 시뮬레이션이다!
이사가 된 김다람은 이제 회사를 '지옥'이라 부르는 대신, '생존 시뮬레이션 게임' 이라고 명명했다. 그녀는 염라대왕도, 스피커도 능숙하게 다루는 레벨업 된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최근 업데이트된 새로운 빌런, 바로 독재자 스타일의 독고다이형 상사 의 등장은 다람을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렸다.
그는 전형적인 극 N성향에 기분파였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통제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행동은 '극혐'이었고,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수시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인물 이였다.
문제는 이번 회식에서 터졌다. 회사에는 김다람도 인정하는 두 개의 라이벌 파가 존재했다. 한쪽은 유연하고 실용적인 A파, 다른 한쪽은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B파였다. 평소 B파에 불만이 많았던 A파의 한 임원이 회식 후, 모두가 보는 사내 게시판에 떡하니 글을 올린 것이다.
"나 무시하지 마!"
그 한마디는 마치 폭탄처럼 회사 전체를 뒤흔들었다. 임원들조차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참혹한 현장 앞에서, 다람은 잠시 눈을 감았다.
'독재자의 기질을 가진 저 빌런은 분명 저 상황을 두고 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대표의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싸늘했다. 그는 곧장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다람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임원은 아마 맨정신에 쓴 글이 아닐 거야. 아니, 맨정신이었어도 저랬을 수도 있지. 어쩌면 이건 그저 사사로운 일탈이 아니라, 그 빌런이 예전부터 꿈꾸던 '울타리' 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젯밤 사내 게시판 글, 다들 보셨겠지.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음 칼날 같았다.
"이런 일탈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행동들을 참고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야!"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때, 다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대표님, 말씀처럼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다람은 대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임원분들께서 서면으로 '회사 내 갈등 방지 및 품위 유지'에 대한 확약서를 작성해 주십사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구두 다짐은 물론 중요하지만, 공식적인 서면 약속은 임원 개개인의 책임감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임원들의 시선이 다람에게 꽂혔다. 몇몇은 놀란 표정이었고, 몇몇은 긍정적인 고개를 끄덕였다. 다람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사안으로 인해 그 임원분 스스로도 충분히 자책하고 계실 겁니다. 다음 임원 간 공식 모임에서 이 상황을 다시 한번 회자하며, 향후 이런 일이 재발할 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임을 명확히 주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경각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는 잠시 다람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다람 이사 말이 일리가 있군. 좋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다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정선에서 예우를 해주고, 동시에 명분을 만들어서 울타리에 가두는 것.'
이게 바로 독재자를 다루는 그녀의 첫 번째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다람은 알고 있었다. 서면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의 임원은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아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극 N성향'을 가진 그들은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고 여기는 순간, 공격적인 으름장을 놓거나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다람은 다음 회식을 계획할 때였다. 그녀는 전략적으로 팀원들을 배치했다. "회식에선 무조건 고깃집"이라는 그녀의 오랜 신념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할 때였다.
그날 회식 자리, 김다람은 문제의 임원 옆에 가장 낮은 연차의 신입사원들을 배치했다. 신입사원들은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기를 굽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색하니까 고기를 굽는 게 편하고, 대화하기 불편하니 반찬을 리필하고, 이모님을 시도 때도 없이 부를 수 있는 '고깃집'의 미학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대표는 고기가 익자마자 소주잔을 들었다.
"자, 건배! 지난번 일은 잊고,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자고!"
문제의 임원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역시나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신입사원들에게
"요새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야근을 싫어하는지 몰라? 라떼는 말이야…"
라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람은 그런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 사람은 힘없는 직원과 싸움을 대체해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경우가 많지. 동급 임원들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는 없으니까.'
다람은 슬쩍 신입사원에게 눈짓을 했다. 신입사원은 얼른 젓가락으로 불판을 뒤적이며 외쳤다.
"아! 대리님, 고기가 너무 타겠어요! 제가 구울게요!"
그렇게 고기가 구워지고, 반찬이 리필되고, 이모님이 불려 다니는 동안, 염라대왕 같던 임원의 입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 내용은 더 이상 회사의 분위기를 망치거나 누군가를 협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술과 함께 녹아내리는
'라떼는 말이야'
이야기들이었다. 할 말이 없으니 말없이 고기 구워질 때까지 소주를 마시다 보면 얼큰하게 취하는 마법 같은 '고깃집 회식'의 효과였다.
다람은 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회사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빌런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며, 때로는 그들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회사 지옥은 여전히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김다람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독재자를 울타리에 가두는 법을 알았고, 스피커를 역이용하는 법을 알았으며, 미친놈의 빌미를 차단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이 지옥에서 자신만의 슬기로운 생존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써내려갈 것이다.
오늘도, 이 지옥 같은 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