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어캣의 흑화, 그리고 김다람 대표의 회한
김다람은 마침내 (주)동물나라의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수많은 빌런들을 퇴치하고, 그들의 본성을 역이용하여 회사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은 그녀의 혁혁한 공로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표실에 앉아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들은 원래부터 빌런으로 태어났을까? 어쩌면 그들도 처음에는 착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잠시 깊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들은 원래 순수한 월급쟁이였다. 특히 지금의 미어캣 대표는 원래 착하고 순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물나라가 홀딩스 동물나라 그룹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 미어캣은 난생처음 '팀장' 직급을 달았다.
"오, 나도 팀장이다!"
미어캣은 신이 났다. 너그러운 팀장이자 그룹 내에서 인기 많은 팀장이길 바랐다. 아직 운전에 서툰 영업부 다람쥐가 운전하다가 동물나라 사파리차 앞뒤 문짝을 다 해 먹고 겨우 끌고 들어왔을 때도, 미어캣은 세상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괜찮아. 담부터 조심하면 되고 안 다치면 돼."
정말 같은 인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어캣은 사내에서 정말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나라에 크나큰 경제 쓰나미가 닥쳤다. 리먼 사태가 터진 어느 날, 그 뒤로부터 심각할 정도로 거래되던 도토리들은 반타작이 되었고, '도토리 반타작 시대'라는 기사 타이틀까지 나서면서 홀딩스 동물나라 그룹은 위태롭기 시작했다.
위기, 그리고 극복. 그들의 운영 중인 인천의 동물원 부지, 개발 중인 전라도 최대 규모의 과수원까지 몽땅 팔아야 했다. 심지어 인천 동물원 부지는 어느 깡패 집단에게 거의 날강도당하다시피 헐값에 삥을 뜯기는 수모를 겪으면서 결국 홀딩스 그룹은 쪼개져야 했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당시 최정상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하던 미어캣은 손수 앞장서서 회사를 재정비하게 되었고, 이렇게 모여든 비슷한 직급의 그들은 십시일반 본인들의 개인 도토리를 모아 새로운 동물나라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에 미어캣은 공로를 인정받아 (주)동물나라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렇게 동물나라 그룹의 시즌 2가 초라하게 시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늘 그룹사의 보호 안, 울타리 속에서 일을 해왔던 그들은 이제 발생되는 모든 문제의 말미에는 그들의 소위 "무한 책임"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업부 다람쥐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도 예사스럽게 보지 않게 되었다.
이를테면,
다람쥐가 뒤로 몰래 도토리 소스를 팔아먹는 건 아닌지?
다람쥐가 몰래 다른 나라의 새앙쥐들과 내통하는 건 아닌지?
언젠가 다람쥐가 본인의 뒤통수를 때리진 않을지?
그랬다. 미어캣은 극 N형이었던 것이다.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고 직감과 육감에 의존하여 모든 걸 결정지으려 했고, 본인만의 삐뚤어진 세계관이야말로 올바른 법이라며 믿는 외골수 그 자체였던 것이었다.
심지어 상상력이 너무나 풍부한 나머지, 영업부 다람쥐 한 마리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구설수에 올랐다가 동물노동부에 강제로 끌려가 된통 혼나고 온 적도 있었다. (아, 이 에피소드, 다람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케케묵은 감정을 켜켜이 쌓아 올리며 미어캣은 점점 흑화 되어갔다.
크나큰 그룹사에 다 같이 옹기종기 있을 땐 작은 것도 서로 나누면서 오순도순 순하게 살았지만, 이젠 작디작은 니 살림을 꾸려나갈 땐 1원짜리 도토리 조각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이 각박해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대표라는 자리를 놓고 박쥐(이사)와 미어캣은 피가 터지도록 싸우기 시작했고, 이윽고 작디작은 동물나라는 결국 분파가 생기고 말았다. 반대를 위한 반대. 다람쥐들의 안녕과 평화는 개뿔, 좋고 나쁘건 간에 내 편이 아닌 자가 발언한 것은 몽땅 반대해 나갔다. 그러면서 동물나라의 휘황찬란했던 과거는 점점 도토리 소비자들 뇌리에서 잊혀 가고 있었다.
기나긴 싸움, 그리고 힘 빠져서 어쩔 수 없이 "종전."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낼 수 없었고, 너무나도 싸우느라 지쳐버린 그들은 더 이상의 큰 소리를 내기 싫어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더 이상의 반대를 위한 반대도 잠잠해지던 그 순간, 새로운 빌런의 등장으로 다들 지쳐가는 가운데 거의 무관심으로 방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부장 나부랭이가 설치는 회사가 되면서 (주)동물나라는 정말 "개판"이 된 것이다.
암울한 미래, 다람쥐들의 미래는? 이런 암흑기에서도 여전히 몇 안 남은 다람쥐들은 힘을 내서 여전히 도토리를 모으고 있다. 도토리가 오르면 팔고 떨어지면 사고, 과연 그들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도토리 쇼크가 한 번 더 오는 날에는 동물나라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그들에겐 아무런 대책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겐 얄미울 정도로 각박한 월급통장, 언젠간 대박 날 거라 믿는 주식계좌만을 바라보며 다람쥐들은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김다람 대표는 회고록을 쓰던 손을 멈췄다. 그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미어캣도, 꿀돼지도, A부장도, 심지어 고성방가 부장도… 그들은 원래부터 빌런이 아니었다.
미어캣은 처음에는 인자한 팀장이었지만, 경제 쓰나미와 '무한 책임'이라는 압박,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의심의 환경이 그를 극N형의 '흑화 빌런'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그를 불안하고 의심 많은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꿀돼지는 단순 업무에 찌들어, '효율적인 게으름'을 추구하다가 '복지 도둑'이자 '업무 태만 빌런'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본성에는 '편안함'과 '돈'이라는 동기가 있었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자 '랜드로버를 뽑는 일잘러'로 변모했다.
A부장은 아마도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내재된 '자격지심'이 '프로 불편러'라는 가면을 씌운 것일 터였다. 그녀의 공격성은 어쩌면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뒤틀린 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성방가 부장은 자신이 뿜어내는 '고성'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어쩌면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무자각 빌런'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냉철한 데이터로 자신의 행동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다람은 대표실 창밖을 내다봤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개판'이었던 동물나라는 이제 그녀의 노력으로 조금씩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빌런은 원래부터 빌런이 아니었다.
환경이 그들을 만들고, 무관심이 그들을 방치하며, 잘못된 대응이 그들을 더욱 악화시킨다.
이제 김다람 대표에게 남은 임무는 단 하나였다. 이 회사 지옥을 '빌런 박멸'을 넘어, '빌런 재활 센터'로, 아니, 아예 '빌런 없는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순수했던 월급쟁이들이 다시금 '인자한 미어캣', '효율적인 꿀돼지', '존중하는 A부장', '차분한 고성방가 부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김다람 대표의 '회사지옥 시즌 2: 빌런 재활 프로젝트'가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