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라이프 따라하다가 월세까지 받게 된 과정-2
신혼집, 24평 구축아파트
28살이 되던 해 가을, 나는 결혼을 했다.
'비혼'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2014년이었다. 결혼을 왜 하는가, 결혼하면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찰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3년 반 지속된 연애가 안정적이었고, 앞으로도 딱히 헤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우리 커플에게 "결혼은 언제 할거냐"라고 끊임없이 묻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이러해서 결혼을 결심했다 하는 비장한 각오가 아니었다, 그저 '안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고 해야하나.
큰 고찰 없이 결혼을 했듯이 신혼집도 주변 어른들 말에 휘둘려 그에 맞는 집을 구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폭등 이전이라 수원 어느 대단지의 20평대 아파트 전세가가 1억 5천~1억 7천에 형성돼 있었다. 전세가율이 무지하게 높던 때라 매매가는 그보다 천만원밖에 높지 않았다, 양 쪽 반반 9천만원씩 1억 8천만원의 결혼자금이 있던 우리 부부가 2-3천만원만 대출을 받으면 아예 이 아파트를 매매도 하고, 깨끗하게 올수리하고도 신혼여행과 결혼식 비용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었다,(당시 웨딩홀과 스드메는 지금보다 훨씬 저렴했으니) 당시 내가 남들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부동산에 대해 공부하고 발품팔면서 알아보았다면 그렇게 결정했겠지.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직접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보다 많이 살아오고 경험한 어른들의 말이 맞을 줄 알았다, 내가 해봤자 뭘 알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주변 어른들은 내게 신혼집은 전세로 구하는 것이라 했다. 잠시 살다가 아기가 생기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게 됐다,
하지만 수리가 전혀 안 된 전셋집은 욕실도, 싱크대도, 신발장도 너무 좁고 불편했다. 오래 된 소형 평수여도 현대식으로 잘 수리하면 훨씬 넓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 내 소유의 집이 아니니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아담하고 알콩달콩할줄 알았던 신혼집은 점점 답답하고 불편한 공간이 돼갔다.
수납할 곳이 없으면 물건의 수라도 줄였어야 하는데 뭣도 모르고 전부 쟁여놓고 살았다. 나는 화장도 기초만 바르고 파운데이션, 립스틱만 바르는데도 부모님 집에서 본 대로 화장대도 큰 것으로 들여놓았다. 어이없게도 큰 화장대는 안방에 꼭 있어야만 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불도 계절마다 몇 개씩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이불장이 터질 듯 이불들을 들여놓았다. 친정엄마는 크고 무겁고 값비싼 이불이 좋은거라며 킹사이즈 구스다운 이불을 사주셨다. 건조기도 없던 당시 이 이불을 세탁하려면 세탁 후 펴 말리는게 더 큰 일이었다, 이 이불을 말리기 위해 커다란 이불 건조대까지 장만했다. 이걸 수납하니 그 협소한 베란다가 온통 꽉차버렸다.
시어머니께서는 철마다 쌀과 김치를 한가득 담아 보내주셨다. 맞벌이에다 아직 아이도 없던 우리 부부가 먹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양이었다, 아담한 냉장고에 들어가질 않아서 베란다에 놓았더니 쌀벌레가 들끓었다, 김치에서도 금새 쉰내가 났다. 아기가지는 데 좋다며 바리바리 챙겨주셨던 흑마늘, 도라지청, 대추차 등도 몸에 좋은 쓰레기가 돼 주방 구석구석에 쌓여갔다. 기대감을 잔뜩 갖고 시작했던 화이트톤의 신혼집은 점점 너저분해지고 어수선해졌다. 먹을 것을 보관하기에 양이 너무 많다면 이 양을 줄였어야 했다. 작은 냉장고에 들어갈 만큼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거절하거나 다른 분께 선물하거나 했어야 하는데 10년전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들을 보관하기 위해 작은 냉장고를 또 하나 사버렸다. 주방은 한층 더 좁아졌다.
신혼집 집들이를 할 때 천척어른들께서 각종 그릇이며 컵들을 선물해주셨다, 정말 예쁘고 고급스러운 식기들이었지만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수리되지 않은 옛날 싱크대 수납장에는 반도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매일 쓰는 식기는 작은 수납장에라도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으나, 남은 식기들이 문제였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것들은 다른 집에 선물하거나 팔았어야 했는데 그땐 그럴 생각을 못했다. 선물받은 건데 선물한 사람들 성의가 있지. 그리고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식기들을 버린다는 선택지를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들을 놓기 위해 간이 선반을 또 구매했다. 간이 선반이 놓인 싱크대 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너저분해졌다. 요리를 할 때마다 물건이 떨어지고 짜증이 솟구치곤 했다.
옷장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늘 시내를 돌아다닐 때마다 조악한 싸구려 옷을 하나씩 사던 버릇을 결혼 후에도 고치지 못했다. 신혼집에 들어오며 마련한 아담한 옷장이 터질 듯 옷이 많아졌지만 막상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입고싶은 옷이 없았다. 싸구려 옷들은 대체로 옷감이 좋지 않아 금방 보풀이 일어나 볼품없어졌다. 그리고 충동구매한 것들은 쇼윈도 조명발을 벗어나자 색감이 전혀 달라졌다. 너무 촌스럽고 튀는 색이 돼버렸다. 독특한 디자인의 티를 충동구매했는데 이 티가 너무 독특한 바람에 함께 입을 치마가 없었고, 같은 이유로 보수적인 직장에 입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쓸모 없는 옷들로 가득해지자 '직장에 입고 가기 무난한'옷들을 또 사대기 시작했다. 옷장이 부족해지자 또 행거를 구매했다. 옷이 너무 많으면 쓸모 없는 옷들은 과감히 버렸어야 하는데 그럴 생각도 못 했다. 언젠가는 입겠지. 산 옷을 아깝게 어떻게 버려.
가방도 마찬가지였다. 조악한 싸구려 가방은 많은데 막상 출근용으로 드는 가방은 한 가지였다. 나머지는 출근 때 들기에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거나 너무 튀었다. 이런 가방들은 출근하지 않을 때도 쓸모가 없었다. 너무 튀거나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가방도 비우지 못하고 좁아 터진 행거와 옷장에 쑤셔 넣어 보관했다.
괜찮을 줄 알았던 24평 신혼집에서도 이전 10평 원룸에서처럼 기가 빨리고 괴리감이 커졌다. 그러면서도 물건을 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쓸데 없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였는데, 당시의 나는 이 집이 너무 오래 되고 둘이 살기는 좁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공간에 애정을 가지지 못하니 삶의 만족도도 높지 못했다. 20대 후반 신혼, 젊음도 건강도 자유도 가졌지만 그 소중한 것들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결혼 후 1년 반만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후 바로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내가 아기를 낳으니 여기저기서 '출산후 구입할 물품'리스트를 마구 추천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기용품은 아기와 엄마의 성향에 따라 필요한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어떤 엄마는 아기가 먹는 양에 비해 젖량이 많아 유축기와 모유저장팩이 필수일 수 있지만, 어떤 엄마는 양이 딱 맞아 그 두개가 불필요할 수 있다. 어떤 엄마는 모유량이 극히 적어 그런 것들보다는 젖병과 소독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아기띠가 필수라고도 하지만 어떤 아기들은 아기띠에 매달리면 더 많이 울기도 해서 그냥 손으로 안아야 하기도 한다. 힙시트가 정말 편하다고 하는데 나같은 경우는 사 놓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전혀 쓰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선배 엄마들은 자기들 기준에 꼭 필요하다 싶은 물건들은 꼭 사놓아야 한다며 부추겼다. 가뜩이나 어수선하던 24평 신혼집에 아기 용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촌언니가 쓰던 범퍼 침대, 맘카페에서 필수라고 하던 쏘서와 점퍼루, 젖병 소독기, 유축기 등등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온 집안을 굴러다녔다. 이러다가 집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물건으로 가득찬 집은, 몇 시간에 한번씩 깨서 우는 딸아이를 퀭한 눈으로 돌보던 우리 부부가 청소하기에 너무 고난이도 공간이었다. 청소기를 돌리려 해도 한발자국 밀고 물건을 들고 또 한발자국 나아가면 또 들어야하고.. 청소도 빨래도, 모든 집안일이 다 버거웠다. 에너지가 한계에 다다르니 둘 다 점점 지쳐갔다. 우리 집도 아닌 낡은 집이 지긋지긋해졌다. 결국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을 최대한 끌어모아 30평대의 신축 아파트로 도망치듯 이사했다. 전세가 지긋지긋했던 터라 무리해서 매매까지 했다. 덕분에 1억 7천에서 그 두 배보다 더한 자금을 들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차리게 됐다. 금수저도 아닌 평범한 우리 부부가, 평생 실감해보지 못한 큰 자금을 집으로 깔고 앉아 살게 된 셈이었다.